읽지 않고 쌓여 있는 책들

책을 읽지 않았어도, 선택의 순간은 이미 나를 보여준다

by Jay thinks 제이띵스

책장 앞에서 멈춘 시간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이 17권이다. 그중에서 실제로 주문 버튼을 누른 건 5권. 그리고 그 5권 중에서 끝까지 읽은 건... 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나머지는 침실 한구석에서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희망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우리는 모두 안다. 사지만 읽지 않는 책들의 존재를. 그 책들이 침실 한구석, 거실 선반, 화장실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그리고 그때마다 느끼는 묘한 죄책감도.


하지만 정말 그게 죄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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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의 순간에 담긴 사실

책을 산다는 건 일종의 선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경제학 책을 살 때는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철학서를 살 때는 깊이 있게 사유하는 사람으로, 자기 계발서를 살 때는 더 나은 버전의 나로 변모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 순간에 응축되어 있다.


그 선택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정체성 표현이다. 실제로 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순간의 의지와 지향이 무의미해지는 건 아니다.


결국 우리가 사는 건 책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언젠가 그 책을 읽었을 때의 나, 그 지식을 체화했을 때의 변화된 모습. 그 미래의 자아를 위한 투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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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들이 말하는 것

쌓인 책들을 다시 보니 흥미로운 패턴이 보인다.


작년에 산 마케팅 관련 책들은 당시 새로운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것이고, 올해 초에 몰아서 산 심리학 서적들은 인간관계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해결하고 싶었던 마음의 표현이다. 최근에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뺀 투자 서적들은... 음, 이건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읽지 않은 책들도 나를 설명한다. 그 순간순간 내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어 했는지,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쩌면 '안 읽었다'는 사실보다 '사려고 했다'는 그 의지 자체가 더 중요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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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어진 독서의 가치

'언젠가 읽겠다'는 말을 자책의 근거로 쓸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현재 상황에 대한 정직한 인정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지금 당장 읽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이 무가치한 건 아니다. 때로는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20대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책이 30대에 와서야 비로소 마음에 와닿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경험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읽을 준비가 되는 책들도 있다.


책을 사두는 것 자체가 미래의 나에게 주는 선물일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그 주제에 대한 갈증이 생겼을 때, 멀리 서점에 가지 않아도 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쌓인 책들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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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가 책을 통해 얻고 싶어 하는 건 지식이 아니라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책을 읽는 순간뿐만 아니라 책을 사는 순간, 고민하는 순간, 심지어 읽지 않고 바라보는 순간에도 일어날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책장에도 분명 읽지 않은 책들이 있을 것이다. 그 책들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그 순간들에 담긴 자신의 의지와 지향을 발견해 보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문자가 아닌 다른 형태일 뿐.


쌓인 책들 사이에서, 오늘도 우리는 조금씩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