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가 사라진 시대

우리는 왜 이렇게 무례해졌을까

by Jay thinks 제이띵스

어제 지하철에서 본 풍경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직장인, 그 앞에 서 있는 임산부. 그리고 중얼거리는 어르신의 목소리.

"아, 요즘 애들 정말 매너가 없어."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정말 우리는 무례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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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말해주는 불편한 진실

2024년 한국갤럽 조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상에서 예의 없는 사람이 늘었다"고 답한 사람이 78%나 된다는 것이다. 5년 전보다 13%나 증가한 수치다. 더 충격적인 건 직장 갈등 지수였다. 공공기관 갑질 신고는 전년 대비 15% 증가, 민간 부문은 매년 20%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부분은 참고 있으니까.


모든 사람이 '갑'이면서 '을'인 사회

"갑질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경희대 송재룡 교수님의 말씀이 참 인상 깊었다.

...맞다. 한국 사회는 참 복잡하다.

부장 앞에서는 고개 숙이는 과장이, 대리 앞에서는 목소리를 높인다. 정규직은 계약직을 무시하고 대기업 다니는 사람은 중소기업을 깔본다. 우리는 모두 동시에 갑이면서 을이다. 이 아이러니한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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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어서 배려도 사치가 되었다

출퇴근 2시간 30분, 실제 근무 9-10시간, 주 2-3회 야근과 회식, 그리고 겨우 6시간의 수면.

여기에 자기계발이니 부업이니 육아니 하는 것들까지 더하면... 언제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하는 것도 좋지만, 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했는데 왜 내가 또 서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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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사회에서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현실

한국의 경쟁은 정말 살벌하다.

수능 상위 1%에 들어야 SKY 대학

대기업 취업 경쟁률은 평균 100:1

같은 기수 중 임원까지 올라가는 비율은 1-2%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연봉의 15-20배

이런 극한 상황에서 '예의'는 때로 생존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느껴진다.

"착한 사람이 손해 본다"는 말이 농담이 아닌 현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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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우리를 더 무례하게 만들었다

온라인에서는 얼굴을 마주보지 않으니까 무례함의 비용이 거의 없다.

포털 댓글, SNS, 온라인 커뮤니티... 일상에서라면 절대 하지 못할 말들이 쏟아진다.

문제는 이런 온라인 행동 패턴이 오프라인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배달앱으로 30분 안에 음식을 받는 데 익숙해진 세대에게 '기다림'과 '배려'는 불필요한 번거로움이 되었다.

20대의 60% 이상이 "음식 배달이 30분을 넘으면 화가 난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보여준다.


세대 간 예의 기준이 다르다

재미있는 발견이 있다.

50대 이상이 생각하는 예의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과 절

웃어른 말씀은 끝까지 경청

회식과 조직 문화 참여

직급과 서열에 따른 예우


20-30대가 생각하는 예의

개인의 선택과 의견 존중

업무와 사생활의 명확한 구분

성과와 능력 중심의 평가

수평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소통


두 세대 모두 나름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기준이 달라서 서로를 무례하다고 인식하게 된다.


일상 속 무례함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10년 전 카페에서: "죄송한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주면 "고맙습니다" 인사.

지금 카페에서: "아아 하나요." (스마트폰 보면서) 음료 받고 바로 자리로 이동.


10년 전 지하철에서: 통화하면 다른 승객들이 눈치를 줌. 임산부나 노약자를 위해 자연스럽게 자리 양보.

지금 지하철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해도 대부분 무관심. 스마트폰에 집중해서 주변 상황을 아예 인지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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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가 진짜 사라진 이유들

1. 우리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한국은 '정(情)' 문화의 나라였다. 마을 공동체, 대가족 제도에서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했다.

하지만 도시화, 핵가족화,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나만의 삶'에 집중하는 문화가 확산되었다. 공동체 소속감이 약해지니 타인에 대한 배려도 줄어든 것이다.

2. 서로를 믿지 않는다

한국의 사회적 신뢰 수준은 OECD 최하위권이다.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이 30%도 안 된다. 신뢰가 없으면 예의도 사라진다.

"저 사람이 나에게 친절한 이유가 뭘까?" "혹시 나를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

선의를 베풀어도 되돌아올 거라는 기대가 없으니, 굳이 먼저 배려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3. 경제적으로 너무 불안하다

청년 실업, 부동산 폭등, 노후 불안... 경제적 스트레스가 무례함으로 표출된다.

연간 근로시간: OECD 2위 (1,915시간)

최저임금 대비 생활비: OECD 상위권

고용 안정성: OECD 하위권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 정신적 여유도 없다. 생존 투쟁에서 예의는 사치가 되었다. 무례함에도 대가가 있다

하지만 예의가 사라지는 게 과연 도움이 될까?

개인적으로는

인간관계가 악화된다

기회를 놓친다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평판이 손상된다


사회적으로는

갈등이 심화된다

생산성이 저하된다

사회 통합이 저해된다

정신 건강이 악화된다


실제로 한국의 행복지수는 OECD 평균보다 현저히 낮다. 경제 발전에 비해 삶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사회적 갈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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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새로운 예의

전통적인 예의가 사라지고 있다면, 새로운 예의는 무엇일까?

1. 시간 존중

약속 시간 정확히 지키기

불필요한 회의나 만남 자제

메시지 확인했으면 간단하게라도 답장

업무 시간 외 연락 자제


2. 공간 존중

대중교통에서 적절한 거리 유지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지 않기

다른 사람의 개인 영역 침범하지 않기

SNS에서 원하지 않는 태그나 언급 자제


3. 선택 존중

결혼, 출산, 종교 등 개인적 질문 자제

음주, 회식 강요하지 않기

정치적, 사회적 견해 차이 인정

세대 간 가치관 차이 수용


예의는 투자다

예의에 대해 생각을 바꿔보자. 예의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투자하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 좋은 인간관계는 더 많은 기회와 행복을 가져다준다

경제적 가치: 신뢰와 협력이 바탕된 사회에서 거래 비용이 줄어든다

사회적 효용: 갈등이 줄면 사회 전체 생산성이 높아진다

정신적 건강: 서로 존중하는 환경에서 스트레스가 감소한다


내가 남에게 보여주는 작은 배려가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믿음.

이 믿음을 회복할 때 우리 사회도 다시 따뜻해질 수 있을 것이다.

"예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

이 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선택이다.

오늘부터 작은 배려 하나씩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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