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는 없다
해외 취업이란 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저도 경험해 보기 전까지는 그저 '해외에서 일하는 것'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외 취업의 뒤에는 함께 뒤따라오는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 문화, 직장동료들과 사내 문화, 베네핏, 프로젝트의 성격, 그리고 그 나라의 시장을 구성하고 있는 커스터머들과 경제구조.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일을 할 때는 당연히 내 삶의 배경인, 언어나 문화 등과 같은 것들을 새롭게 배우고 체득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해외 취업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들은 언어와 문화라고 생각이 됩니다.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하지만 적응한다면 삶에서 많은 부분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언어와 문화적인 부분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해서는 절대 얻어질 수 없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몸으로 부딪치며 자연스럽게 체득해 나가 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학교에 다니며 다양한 나라의 학생들과 언어, 문화 등을 자연스럽게 경험해서 회사에 취업 후 언어나 문화적인 부분에서 충돌 없이 잘 녹아들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해외 거주 경험이라든지 유학 경험 없이 바로 해외 취업을 할 경우 언어나 문화에 적응하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과 스트레스가 수반됩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는 본인이 가진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들과 기술들을 과감히, 자신만의 감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언어뿐만이 아니라 시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직업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분명히 언어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분명히 언어는 업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다른 디자이너들과의 피드백 및 코멘트 쉐어링, 커스터머와의 미팅, 회사 내의 개발자들과 마케팅팀과의 커뮤니케이션 등 정말 단순히 디자인만 하는 디자이너는 없습니다. 인턴급이나 주니어급 정도의 디자이너들에게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도 보단 디자인에 대한 요구도가 높겠지만 경력이 쌓이고 팀을 이끌거나 관리를 하는 시니어나 리드급이 될 때에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시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언어는 기본이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입니다.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해외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에게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고, 그 나라 사람들은 직접적인 제품의 사용자들이 되기도 하며 커스터머이고, 시장 그 자체입니다. 문화적인 맥락의 이해 없이 사용자 테스트, 데이터만을 토대로 결코 완전히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없습니다. 색상, 제품, 브랜드 그리고 디자인은 문화적인 맥락과 관점에 따라서 수도 없이 변모하고 다르게 해석됩니다. 이러한 점을 항상 명심해두고 때로는 이 사람들의 관점에서 디자인을 바라보기도 하며, 때로는 전혀 다른 백그라운드, 아시아인으로서, 한국인으로서,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한다면 분명히 신선하고 유니크하며 다양성을 가지고 올 수 있는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 말고 새롭게 배워야 하는 부분들은 회사마다 전부 다 다르지만, 잘 체계화돼 있고 끊임없이 접하기 때문에 적응하시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회사를 몇 개월 정도만 다녀봐도 어떻게 시스템이 돌아가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떠한 베네핏 등을 제공하고 회사의 주요한 프로젝트들의 분야가 어떤 쪽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릴 핀란드의 언어와 문화는 직장 내에서에 국한된 내용입니다. 생활 전반에 걸친 전반적인 언어와 문화를 다루기에는 그 양이 매우 방대하고 저도 속속들이 전부 다 알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견해와 경험에 근거하여 직장의 언어와 문화에 대해서 다루어 볼까 합니다.
저는 현재 헬싱키에 위치한 IT 컨설턴트 회사에서 UX 디자이너로 근무 중입니다. 제가 경험한 직장 내 문화는 사실 제 회사에 국한된 내용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핀란드 회사가 어느 정도 비슷한 문화와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표면적인, 다른 직장인들로부터 들은 공통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핀란드 대부분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IT회사들의 경우는 어느 정도 외국인을 채용하며 그 비율은 회사의 목표나 방침, 또는 HR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저희 회사의 경우는 약 10% 비율로 외국인 근로자가 차지하고 있으며 국적은 한국인 저를 비롯하여 베트남, 중국, 인도, 파키스탄, 아랍 에미리트, 러시아, 이탈리아, 브라질, 스페인, 독일, 영국, 미국 등의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피스는 본사/분사의 개념이 아닌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위치한 도시로는 땀뻬레, 유바스큘라, 뚜루꾸, 헬싱키, 뮌헨, 스완지, 런던, 탈린, 마드리드 등에 위치해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도시와 다양한 나라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회사다 보니 당연히 일하는 공용어로는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100% 완벽하게 영어로만 업무를 처리하지는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핀란드어를 못하기에 당연히 100%로 영어를 사용하지만 많은 인원의 핀란드 디자이너들, 특히 커스터머들 또는 사용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서비스 디자이너들이나 UX 디자이너들은 자주 핀란드어를 사용하곤 합니다.(워크숍이라던지 커스터머와의 미팅, 유저 테스트 등의 경우에서) 또는 자신들끼리 미스 커뮤니케이션을 줄이기 위해, 혹은 빠른 시간 안에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쓰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핀란드 사람들과 함께 일할 시에는 100%까지 완벽하게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고 모든 걸 이해하기에는 분명히 한계점들이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일하는 데 큰 불편을 느낄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저희 회사 말고 이런 모든 사소한 부분들에서도 무조건 영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다른 많은 핀란드 회사들도 존재합니다. 또한 제가 핀란드어로만 오가는 대화 내용을 불편해하거나 알고 싶어 하면 기꺼이 영어로 대화를 바꿔줍니다. 워낙 어릴 적부터 언어교육을 잘 받는 핀란드다 보니 웬만한 사람들은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나 문제가 없습니다. 이들과 완벽하게 섞이기 위해서는 핀란드어를 배우는 게 좋겠다고도 느끼지만, 또 배우기 힘든 언어이기에 선뜻 시작했다가도 포기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핀란드어는 한국어와 함께 배우기 힘든 언어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영어와 다른 어원과 문법 체계, 용법과 느낌이 전혀 다른 구어체와 문법체의 사용은 언어를 배우는데 큰 부담과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결국 핀란드어를 배우는 대신에 좀 더 영어 구사를 다듬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문화적인 부분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우선 핀란드 대부분의 회사들은 출퇴근 시간으로부터 자유롭고 하루 정해진 근로 기준 시간은 7.5시간으로 일주일에 총 37.5시간을 일하면 됩니다. 일하는 장소도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존중해줍니다. 자택 근무도 굉장히 자유로우며 정해진 업무 책상이 없기 때문에 회사 어느 곳에서든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일을 끝마친 후에 정리해서 가면 되는 방식입니다. 근로시간을 기록하는 방식으로는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저희 회사는 자체적인 근로시간 기록 사이트가 존재해서 제가 일한 시간과 어떤 업무를 보았는지를 간단하게 한 줄로만 기재해서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기록하는 방식이며 초과 업무를 했을 시에도 본인이 초과한 시간만큼 기록을 하면 됩니다. 그만큼 개개인들의 선택과 양심을 존중하며 그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따로 관리를 하거나 정확하게 체크를 하지 않습니다. 추후에 초과한 시간만큼을 휴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최대 40시간, 즉 5일을 휴가로 쓸 수 있고 특별히 바쁘지 않다면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습니다.
7월의 핀란드는 대부분 모두가 휴가를 떠나는 달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이미 클라이언트들도 알고 있고 클라이언트들 또한 전부 휴가를 떠나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7월은 모두가 쉬는 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휴가를 대부분 3주에서 5주까지도 다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국가로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코티지(호숫가에 위치한 개인 별장, 오두막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우나를 즐기고 시간을 보냅니다. 주로 자연에서 여가를 보내는 것을 즐기며 여름에는 암벽등반, 겨울에는 스키와 같은 스포츠도 많이들 즐기는 편입니다.
저희 회사의 구조는 계급이 아예 없이 모두 동등한, 직업 이름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주니어 혹은 시니어라는 표현을 아예 사용하지 않고 모두가 UX 디자이너, 프런트 엔드 개발자 등으로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팀 프로젝트에서 따로 리드가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일을 균형 있게 분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러한 경우다 보니 누구도 큰 책임을 가져가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조금 답답한 경우들도 경험하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회사에서 이벤트들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들 같은 경우에는 2주에 한 번씩 다 같이 모여서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서로 필요한 것들이 있는지 가볍게 회의를 하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핀란드에 있는 모든 디자이너가 한 오피스에 모여서 다 같이 크게 회의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이벤트들 말고도 학생들 혹은 외부 사람들을 불러서 회사 홍보 겸 네트워크 파티를 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회사 직원들끼리 친목 도모를 위해 클럽활동이라든지 사우나, 오피스 파티를 여는 경우들도 자주 있습니다.
핀란드의 직장 내에서의 언어와 문화적인 부분은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굉장히 오픈돼있으며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모두가 잘 도와주는 편입니다. 그래서 저도 시작을 하기 전 많은 걱정을 했었지만 편하고 즐겁게, 이상적인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가며 인간답게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입니다. 각각 개개인들의 삶을 중요시하고, 근로자들이 즐겁게 일해야 클라이언트들도 즐거울 수 있다는 모토 아래, 최고의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 또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