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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응의 축제 Oct 27. 2024

2. 부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

사별 이후 일상생활을 살아가면서도 멍한 상태는 종종 이어져 왔고, 그런 감각은 무기력을 동반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현실감 역시 없었다. 어머니의 투병 생활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에, 잦은 입·퇴원으로 인한 그녀의 부재는 연례행사처럼 늘 있는 일이었다. 그 주기가 본격적으로 짧아지기 시작한 건,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1998년 무렵부터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주기적으로 어머니의 입·퇴원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어린 나를 돌보기 위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번갈아 집에 오시곤 했다. 당시 내가 썼던 그림일기에도 그러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림 1-1>과 <그림 1-2> 모두 1998년에 쓰인 것으로 학령기 나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지만, 만으로는 6살일 때였다. 당시 난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급하게 동네 교회 목사님 댁에 맡겨지거나, 할머니가 돌봐주러 오시곤 했다. 이 시기부터 주 양육자가 자주 바뀌곤 했다. 이렇게 홀로 시간을 보내는 기록들은 당시 그림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분석한 그림일기 자료는 총 4권으로 1998년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이전까지는 정기검진 정도로 병원을 방문하던 횟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한 번 입원하면 장기간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그런 어머니를 기다리는 것이 어려서부터 익숙했다. 아무도 없는 집안을 들어가는 일은 내게 낯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신체적으로 컨디션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한 어머니는,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예민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런 변화 속에서 어린 나는 자주 혼나고 자주 집 밖을 나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잔뜩 화가 나 있는 어머니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어린아이가 선택한 생존방식이었다. 


그러한 흔적은 <그림 1-3>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그림일기는 어머니에게 혼이 난 날 작성한 그림일기로, 다른 기록들과 사뭇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글씨가 정갈하지 않고 띄어쓰기가 전혀 없으며, 글씨가 틀리고도 지우지 않고 이어서 쓴 흔적이 보인다. 또한 채색이 들어가지 않은 유일한 그림일기이기도 했으며, 종이를 꾹꾹 눌러 그렸다가 지운 흔적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심지어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는 입·퇴원 주기가 한 달, 일주일 간격으로 아주 짧았기에 ‘어머니가 없는 집’은 내게 굉장히 친숙한 공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어머니를 사별한 이후 한 계절이 지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아무도 없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하교 인사를 하곤 했다. 집에 오면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인사를 시작으로 화장실, 작은 방, 서재, 베란다 등등 집 안의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가 인사를 하며,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자, 어머니가 없음을 물리적으로 확인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심지어 문을 벌컥 열고서 “응? 없네?”라는 발화를 실제로 하기도 하며,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마치 진짜로 있다고 생각하는 듯, 집 안을 배회했다. 당시에는 이런 스스로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 행동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게 된 때는 서늘한 가을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짧았던 반팔의 교복이 어느새 춘추복으로 바뀌었고, 해가 조금 더 빠르게 지기 시작할 시기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다. 별다를 것 없이 어제와 똑같은 날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고요한 집안의 공기가 그 전과는 다르게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선 순간, 거실을 가득 채운 시뻘건 노을과 적막감이 숨막히게 다가왔다. 이 넓은 공간에 사람이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다는 감각이 확 밀려 들어왔다. 그날은 처음으로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도 하지 않고,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보지도 않았으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베란다 창문으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게 한참 동안 완전한 어둠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멍하니 앉아있었다. 



힘없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점점 사그라드는 노을과 어두워지는 거실을 바라보았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 공간에 나 혼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이 숨막히는 적막을 깨트려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걸음을 걸을 때면 늘 들리던, 마른 발바닥과 장판 사이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금까지 방문을 열고 다니며 했던 인사를 ‘이제 더는 할 필요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신자는 있으나 수신자는 없어진, 의미가 사라진 행동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둑이 터져 무너져 내리듯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 진짜 혼자구나’ 싶은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울컥 울음을 토내했다. 스스로의 울음소리에 놀랄 만큼 소리 내어 짐승처럼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처음으로 목놓아 울어본 날이었다. 말 그대로 목이 쉬어라 소리를 내며 엉엉 거실에서 울었다. 아마 내 몫의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 이후로, 그렇게 온몸으로 울음을 토해낸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침묵으로 가득 찬 어두운 거실의 불을 환하게 밝히는 것뿐이었다. 


어머니의 장기 투병은 나에게 '언제고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지만, 그것을 직접적인 나의 사건으로 맞이하는 것은 또 다른 범주의 것이었다. 상상과 현실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어린 나는 '세상을 떠나는 것'과 '물리적으로 내 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간접적으로만 느꼈을 뿐, 그것이 피부로 와닿는 경험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계절이 지나, 6월의 뜨거운 공기가 서서히 식고, 서늘한 가을의 공기를 품고 나서야, 물리적으로 이 세상에 '나의 엄마'는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였다. 비로소 그녀의 죽음이 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제는 ‘없는 번호’가 된 어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계속 거는 일 또한 사별 이후 한동안 반복되었다. 이전에는 학교 쉬는 시간마다 자주 전화를 걸곤 했는데, 공백이 생겨버린 그 시간에 이제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고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사실 전화를 걸어서 했던 말은 늘 별 것 없었다. 식사는 하셨는지, 약은 챙겨 드셨는지, 산책은 갔다 오셨는지 등등 소소한 일상을 물어보는 안부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로 평소와 똑같은 대답이 들려오면, 안심하며 수다스럽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 습관은 오래도록 남아 한동안 단축번호 1번을 계속 누르게 했고, 전화를 걸 때면 자주 서 있곤 했던 교실 창가에 서서, 하릴없이 핸드폰만 만지작거린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다가 이 패턴도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하지 않게 되었다. 늘 단축번호를 누르고 잠시간의 정적 이후,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오기 전에 재빠르게 전화를 끊었는데, 그날은 그 안내 음성이 다 나오고 영어 안내가 나올 때까지도 계속해서 전화를 끊지 않고 들었다. 마치 방문을 열며 어머니가 ‘없음’을 확인하던 것과 같이, 이 전화번호가 이제는 ‘없는 번호’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과도 같았다. 아마도 시기적으로는 하교 인사를 더 이상 하지 않았을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안내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을 끝까지 들으며, 하굣길에 추운 골목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사별 이후 어머니의 부재를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깨닫게 된 것과 동시에, 그러한 ‘부재를 경험하는 나’를 타인이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해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며, 과도하게 예민해지는 일도 동시에 일어났다. 처음으로 기억하는 외부의 시선은 바로 친구들의 시선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처음으로 등교했던 날을 회상하면 어색하고 불편했던 감정이 떠오른다. 친구들을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할지, 내 표정이 어색하지는 않을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야 하는데, 또 너무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정제되지 않은 불안하고 뒤숭숭했던 마음이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친구들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야 할지 가늠이 안 섰다. 나는 그렇게 불안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을 감추려고 일부러 더 과하게 웃고, 더 너스레를 떨었으며, 그런 대화가 끝나고 자리에 돌아오면 금세 지쳐 책상에 엎어지곤 했다. 그때 당시의 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평소와 같이 집에서 있었던 일들이나, 어머니와 있었던 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할 때, 종종 서글픈 마음이 올라왔다. 나는 이제 그렇게 투정을 부릴 어머니도, 너스레를 떨며 웃긴 농담을 주고받을 어머니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그 생각이 확 찬물을 끼얹듯이 다가왔던 그때의 감정이 한동안 생생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친구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집에서 어머니와 있었던 일화를 말하며, 속상하고 서운했던 감정을 털어놨을 뿐이었다. 흔히 또래 친구들과 나누는 수다스러운 주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제 막 일주일이 되었을 시점이었다. 점심을 먹고 친구 두 명과 복도를 걸어가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몸은 관성적으로 그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지만, 정신은 아득히 멀리 떨어져 점점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란스러운 복도를 걸어가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친구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더 이상 그 일상적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머니-딸’ 사이의 감정 교류에 이제 더는 현재진행형으로 이해의 단어를 뱉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애써 어색하게 웃으며 친구에게 ‘속상했겠다’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이 오래도록 나의 감각에 남아있었는데, 당시 그 말을 듣자마자 소란스러운 복도가 조용해지며, 내가 이 공간에 있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이인감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일상 가운데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해리 증상 중 하나이다. 이인감은 분리된 느낌을 말하며, 마치 자신의 마음이나 신체에서 빠져나와서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을 일컫는다. 


온몸의 감각이 붕 뜨며, 마치 제삼자의 시선으로 내가 복도에 서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찰나였지만 사방이 고요해지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명도가 낮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복을 입은 채로 우주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멍한 감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친구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웃으니 같이 따라 웃었고, 관성적으로 발을 움직이며 같이 걸어갔다. 물론 그 감각이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왁자지껄한 복도에 서 있는 나’로 감각이 돌아왔고, 다시 친구들의 대화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때의 감각이 주는 충격은 한동안 선명하게 손끝에 남아있었다. 


이처럼 부모를 사별한 자녀는 부모가 모두 생존해있는 친구들과 함께할 때, 때때로 강한 감정의 격동을 경험한다. 그 감정은 슬픔, 그리움, 질투, 공허감, 소외감 등의 형상을 띠며, 특히 친구들의 말을 들으며 상실한 현실을 자각했을 때마다 그러한 감정을 강하게 느낀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상실한 부모와 다시는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 이와 같은 심리적 어려움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 힘들고 불편했던 상황은 바로 교회 사람들을 마주할 때였다. 어머니 사별 이후 여전히 슬픔에 머물러 있는 나에게 어른들이 보냈던 어설프고 잘못된 위로는 나를 더욱 고개 숙이게 했으며,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무언가 잘못되고, 실수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당시 나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면, 그가 무슨 말을 건넬지 가늠을 할 수 없어, 한동안 눈 맞추는 것을 피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다녔다. 그가 건네는 것이 위로의 말이든 응원의 말이든, 그때의 나에겐 그 모든 것이 버거웠다. 빨리 밝고 활발한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떠한 ‘세상의 기준’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거기에 속하지 못하고 여전히 우울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나는 바람직하지 않고, 틀렸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아, 더욱 움츠러들었다. 



특히나 ‘어머니는 이제 천국에 가서 아프지 않을 테니, 너도 이제 그만 슬퍼해야지’, ‘우울한 감정은 신앙적으로 잘못된 거야’, ‘어머니가 그렇게 희생하면서 너를 낳으셨는데, 그러면 너도 신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잘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니니?’라는 식의 피드백과 삐뚤어진 위로 방식은 더더욱 자기개방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조금 용기를 내어 한 발 나아가보려 하다가도, 다시금 심리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이 자기개방에 실패했으며, 나의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좌절의 순간들이 뒤따라오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그러한 순간들이 점차 쌓이자, 스스로 나의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될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점점 스스로 고립되기를 선택하였다. ‘어머니 희생적인 사랑을 왜 넌 모르니’라는 의미를 담은 타인의 발화들은, 스스로를 개방해보려 노력했던 나의 조그마한 마음과 의지들을 전부 철수시켜버리게 했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불신은 더욱 스스로를 골방에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당시 이런저런 챙김과 반찬들이 부담스러웠던 이유도, 이러한 주변 어르신들의 피드백들로 인해 파생된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이렇게 챙겨주니, 너는 빨리 괜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야지’하는 식의 보상을 바라는 것만 같아, 부채감이 들었다. 타인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는 것에는 반드시 그에 마땅한 보상심리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도움을 주는 이가 원하는 방향의 상태를 보이기 위해, 애써 노력하고 나를 도려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현재의 내 형편과 모습에서 많이 벗어났다 할지라도, 상대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야 할 것 같았다. 이는 유년 시절 내가 어머니와 맺은 유대관계에서 형성된 사고방식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동안의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의 생각과 입을 차단하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과하게 고민하고 예민하게 살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외부로 보이는 나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괜찮은 척 포장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나의 감정을 돌보고 어머니와의 미해결된 감정을 덮어두기에 급급했다. 호수 위를 헤엄치는 오리처럼, 내면은 복잡하고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발장구로 정신이 없는데, 겉모습만은 평온해 보이려고 애썼다. 


애도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충분히’ 고인을 애도하는 것이다. 이때의 충분함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개인마다 느끼는 지점이 다를 것이다. 애도는 사별자와 고인의 관계, 사별 원인, 사별 경과 기간, 사별자의 성향 등 영향을 미치는 조건이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식화된 수치로 애도 기간을 산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슬픔이나 비탄이 사별자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별자가 충분히 고인을 자신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현재의 감정에 머무르며 고인의 부재를 수용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되고 성급한 위로 방식은 사별자에게 비수가 되기도 하며, 자기개방을 철회하고 애도를 지연시키도록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별 이후 자기개방을 하지 못하고 심리적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가정 내에서도 심리적으로 지지해주고 안전기지가 되어줄 대상이 없다는 것 역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부모로부터 안전기지를 제공받는다는 것은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심리적 발판을 획득하는 것이며, 이후 언제든 다시 안전기지로 돌아와 정서적 재충전을 하거나 불안을 관리할 수 있는 내적 자원이 된다. 하지만 부모 가운데 한쪽이 투병 생활을 하거나 사망하였을 경우, 안전기지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게 된다. 아동이 정서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는, 안전기지가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는 고등학생인 나에게 “너는 스무 살이 넘으면 나랑 따로 살아야 돼 넌. 너랑 나랑은 이제 따로야.”라는 말을 4~5번 반복해서 말씀하셨는데, 당시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나는 이 말을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살아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곡해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은 어릴 때부터 뿌리 깊게 박혀있던 나의 핵심감정인 ‘죄책감’을 자극했고, 유기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장보고, 청소하고, 바느질하고, 빨래하고. 이런 것들이 생각보다, 온전히 나의 일이 되니까 챙겨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빨래 돌리는 것도 세탁기가 다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 세탁기도 청소를 해줘야 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뭔가 다리미질이 그렇게 힘들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그래서 제가 한동안은 음... 엄마가 했던 것들을 제가 빈틈없이 메워야 한다는 그런 생각들이 되게 강했던 것 같아요. 그때 당시 저는, 아빠 와이셔츠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하루종일 다리미질을 한 적도 있었어요. 아빠 출근할 때도 다리미질 하고 있고, 와서도 다리미질 하고 있고. 그걸 내가 처음 해보니까 다리미질이 된 건지 안 된 건지도 잘 모르고, 그냥 그것만 하고 있었던 거예요.
(집단상담 5회기 축어록, 2020.12.15.)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재편된 가정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역할을 내가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오랜 투병 생활로 인해 집안일을 조금씩 하고는 있었지만, 사별 이후의 상황은 또 완전히 달랐다. 빨래를 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다리미질하거나, 간단한 생필품은 마트에서 홀로 장을 보는 것 등 일상생활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졌다. 심지어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한동안 공과금을 내지 않아 연체금액이 쌓여있기도 했다. 빨간색의 공과금 지로를 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서서히 어머니의 빈공간을 몸소 느끼게 됨과 동시에, 일상에서 신경 써야 하는 살림의 영역 또한 상당히 광범위하고 촘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한동안 친척 어른들에게 한 달에 한 번 주기적으로 안부 전화를 드리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동안 한 번도 전화하지 않던 조카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살갑게 일상적인 안부를 물어본다는 것에서 오는 당황스러움이, 수화기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다. 어머니가 이제 없으니, 어머니가 생전에 하셨던 것을 이제는 내가 담당해서 대신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행동하곤 했다. 


이처럼 어머니를 사별한 가정에서는 재편된 환경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다른 몫의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특히 집안일이나 집안의 대소사 등을 챙기는 등의 역할을 자녀가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발달심리학적으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또래 집단 및 사회와의 상호작용에 집중해야 하는 청소년기에, 자신의 발달과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자신의 내적 성장이나 가치관 형성 등에 몰입하기보다, 그 외의 환경에 더 몰두하고,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발달과업 지연이 야기될 수 있다.



어머니를 사별한 이후, 이전에는 평범하게 해오던 일들이 더 이상은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순간은 계속 이어졌다. 목욕탕을 가는 일도 어머니와의 기억이 있는 공간이었고, 그 일상성의 공간이 낯선 존재로 다가왔다. 그 후로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나의 내면에는 늘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집에서 마땅히 가정 교육으로 배우며, 또 한 명의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익힐 수 있는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네지 않았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불안해하며 늘 상대의 기미와 상황을 살폈다. 어쩌면 어머니 앞에서의 내 모습이 고착되어, 계속해서 타인의 기색을 살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점점 주변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이 늘 기저에 깔려있었다.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배우거나 자연스럽게 학습하지 못한 것이,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드러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올라오곤 했다. 그러한 생각들로 인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유난히 불안해했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삶의 기준을 내 자신이나 내적 가치관에 둔 것이 아닌, 타인의 시선에 두며, 혼자 지레짐작 겁을 먹고 근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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