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저승사자와 흰머리 소년
'우리 집 저승사자(딸)'가 집에 왔습니다.
올해 초 중등임용고시에 합격해서
중학교 1학년 담임을 맡았으니
첫 사회생활, 첫 임지, 첫 담임.
얼마나 긴장되고 고단했을지 짠한 마음입니다.
모처럼, 주말에 아이가 집에 들어서는데
거실이 한층 환해지고, 집안 분위기가
확 살아나는 게 느껴지더군요.
간단히 삼겹살을 구워 저녁식사를 차렸습니다.
그간 나누지 못한 묵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할아버지! 요즘 운동 어떻게 하세요?"
"살이 많이 빠지고 좋아 보이시니 다행이에요."
할아버지께 참 살가운 녀석입니다.
흰머리 소년은 그저 좋아서 싱글벙글이십니다.
"아빠한테는 뭐 궁금한 거 없냐? 어?"
"아빠는 안 물어봐도 뻔해, 어휴~~"
이 것들은 크고 나니까
할아버지만 좋다는 심보입니다.ㅎ
하기야, 흰머리 소년은 우리 집 저승사자가
집에 올 때를 대비해서 매일 운동을 나가서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를 잔뜩 사 오십니다.
"애가 오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사 오세요?"
"언제 와도 올 건데 뭐 먹을 거라도 있어야지.."
그렇게 쟁여둔 간식이
왜인지 점점 줄어드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참고로, 저는 군것질 안 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사이다 보니
저는 뭐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일쑤지요.
흰머리 소년은 손녀에게
그간 저의 만행을 일러바치기 바쁘고,
우리 집 저승사자는 그런 제게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 잔소리를 날립니다.
"아빠! 그럼 돼 안 돼? 어?"
이쯤 되면, 저는 그저 숨만 쉬고 있는 겁니다. ㅎ
그렇게 밤이 깊어졌고,
아이는 요즘 배드민턴을 치고 있다고 했지요.
가만히 있는 제게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그럼 또 제가 한 수 가르쳐 줘야지요. ㅎㅎ
일요일 아침 일찍 체육관에서 함께 라켓을 들었습니다.
아빠가 제법 치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깨질 줄은 몰랐다며
아주 기분 나빠했습니다. 하하하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흰머리 소년은 꼭 점심을 사줘야 한다며
우리를 앞세워 중국집으로 향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웃렛에 들려 쇼핑도 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했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지나갔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제 책장에서 평소 읽고 싶어 했던 책 여러 권을
꺼내 가방에 챙겨 담더군요.
그리고는 할아버지께 살며시 봉투를 내밉니다.
"할아버지 이거 얼마 안 돼요.
꼭 할아버지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흰머리 소년은 펄쩍 뛰며 "너 써라"하시는데
이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야! 아빠는?"하고 따졌습니다. 하하하
어느덧 커서
할아버지 용돈도 챙길 줄 아는
든든한 어른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뿌듯한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결국 흰머리 소년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아이를 배웅했습니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도 행복입니다.
제 곁에 이토록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