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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 소년께 잔소리를 한참 하고 돌아봅니다.

그깟 우유 한 통이 뭐라고.

by 글터지기

일요일 아침에는 새벽에 헬스장을 갑니다.

평일에는 출근시간이 이르다 보니

운동을 하고 출근할 수 없으니,

일요일에만 누리는 호사입니다.


헬스장을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작은 공원.

휴일 아침에는 한적하고, 조용합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공원 입구에 낯익은 어르신 두 분,

뒤에 걸어오시는 분이 분명 흰머리 소년입니다.


앞선 어르신은

앞서 걷다가 흰머리 소년을 기다리시고,

또 걷다가 이야기를 나누시며 오십니다.


흰머리 소년과 눈이 마주칩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이런 눈빛.


"저도 운동 왔다가 들어가는 길이에요"

"나도 운동한다."

곁을 지나칩니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 공원 입구에는

직접 재배하셨다는 어르신들의

작은 채소 좌판이 벌려져 있습니다.


분명 눈요깃거리였을 건데 지나치신 모양입니다.

'분명 아버지 가는 길에 멈춰 섰을 자리'


좌판을 곁눈질하고 지나쳤을

흰머리 소년을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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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시절

우유 급식 신청을 의무적으로 했었습니다.

신청하고 싶지 않아도 회비 납부처럼

봉투에 알림장이 오면 비용을 넣어 보내주셨지요.


저는 우유를 마시면 설사를 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는 마시지 않는 음료입니다.


흰머리 소년은 우유를 매일 드시지요.

마트에 다녀오시면 한 통씩 사 오십니다.

그것도 큰 통으로 1+1으로 사 오시니

마시다 보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버리는 것도 많습니다.


어느 날부터 우유가 냉장고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안 드시나 보다 싶었습니다.


며칠 전, 식탁 위에 보이는 밀가루 같은 봉지.

자세히 보니 분말 우유.


일명 '전지분유'

믹스 커피 타서 한 잔 드시듯, 전지분유도 한잔.


"옛날 맛 그대로더라"

"아버지, 애기예요? 그걸 드시게?

그건 당뇨에 치명적인 거예요"

잔소리를 한참 늘어놓았습니다.


그리곤 가만히 생각합니다.

내가 마시지 않는 거라고

신경 자체를 쓰지 않고 살았는데

아들놈에게 '우유 좀 사와라'하지 못하시고

혼자 마트에서 이것저것 찾아보셨을 쓸쓸함.


그깟 우유, 내가 배송 갈 때

작은 거 하나 사 오면 되는데

그 정성은 없으면서 잔소리만 늘어놓았습니다.


내일은 매장에서 우유를 사 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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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지난 일요일 아침 집에 오실 때는

검은 봉다리에 상추를 사 오셨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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