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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Choi Nov 17. 2021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나의 책 읽는 패턴은 다음과 같다. 주말에 서점에 잠깐씩 들르면 꼭 충동구매를 한다. 그리고 그 한두 권을 들고 바로 카페에 가서 후루룩 앞부분을 읽어넘긴다. 그러면 그 책들은 앞에 3분의 1 정도만 펼쳐진 자국이 있는 채로 책상 위에 계속해서 쌓여간다. 그리고 다음 번 충동 구매에서 데려온 친구들이 그 위에 또 쌓여간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마치 뷔페를 맛보듯이 읽게 된다. 쓰고 보니 책 읽는 패턴이라기 보다는 책 사는 패턴 같군요.


두어달 전에는 처음으로 쿠팡에서 하루키의 에세이를 한 권 주문했다. 마침 서점에 재고가 떨어져서 바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출간된지 한참 지난 책이라 다음에 온다고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문을 넣어놨다. 책은 하루 이틀 만에 배송이 되어 왔지만, '너무 읽어보고 싶은' 마음의 상태는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이 불행한 친구는 앞부분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뽐낼 기회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책장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몇 주 지났을까. 여행을 갈 일이 생겨서, 여행에는 역시 하루키지 - 하고 바로 그 책을 딱 집어들었는데, 책에서 낱장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었다. 박스를 뜯자마자 보지도 않고 넣어 놨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열어보았더니, 일부분이 인쇄와 제본이 비뚤어지게 된 파본이었다.


아쉬운대로 다른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챙겼고, 가는 길에 하루키의 에세이를 한 권 더 사서 일주일 넘게 하루키만 세 권을 들고 다녔다. 물론 세 권 다 앞부분만 절반 정도 읽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며칠 뒤, 인쇄가 잘못된 책을 바꾸기 위한 모험이 시작됐다.


나는 사실 별로 까다로운 소비자가 아니다. 온라인으로 뭔가를 사고도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가끔 온라인으로 옷을 사서 팔이 좀 길거나 짧은 게 와도 그러려니 하고 입고 다닐 정도다. 물론 몸통이 작은 옷이 오면 밖에선 입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만 입는다.


하지만 이 책은 오래 전부터 사고 싶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이고, 출간일이 오래되어 언제 절판이 될지도 모르고, 한 권을 더 사자니 두 권을 갖고 있기엔 영 귀찮아서, 하는 수없이 판매자에게 온라인으로 문의를 넣었다. 그런데 출간물의 경우에는 여차여차한 사정 때문에 꼭 쿠팡 고객센터로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화라니! 인터넷에 떠도는 명문장 <식당에서 남자 단골손님 만드는 방법>  적이 있나요? 남자손님을 다루는 핵심은 바로 "주인이 아는  하지 않기" 것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결국 다섯번째 북벌에 나서는 제갈량의 심정으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짧은 통화 끝에 그야말로 극진한 사과의 말씀과 함께 며칠 지나지 않아 곧바로  책을 받아서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너무 회사 생활에 오래 찌든 것일까. 아니면 감정이입을 과하게 하는 걸까. 통화를 하는 3분 남짓한 시간 동안 "네", "아니오"로만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라는 인삿말을 듣고, 또 교환이 끝난 뒤에는 "부족한 실력이지만 상담으로 만족을 드릴 수 있어 기쁘다"는 문자를 받았는데, 어딘가 시간의 축이 살짝 어긋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다양한 종류의 고객들이 고객센터에 들이닥쳤던 걸까. 이렇게까지 매뉴얼에 써 있다면 쿠팡은 얼마나 무서운 회사인 걸까. 이렇게 사과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은 어떤 기분으로 일을 하고 퇴근을 할까.


때로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너무 뻔뻔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사과하기도 한다. 그 뒤로 며칠간 몇 개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까지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인쇄가 잘못된 것 뿐이잖아요."




아 물론 아직 그 책은 시작도 못했습니다.

(표지 사진 출처: 땡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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