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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Dec 07. 2017

나는 일을 죽어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일을 그냥 하고 싶을 뿐이다.


내겐 여가시간이란, 마치 전설에 나오는 용과 같았다. 상상도 해보고 어딘가 비스무리한게 존재한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 실제론 만나보지 못한 존재랄까.


한국 회사에 다니던 시절의 나는 항상 '살기 위해 죽어라 일하는 사람'이였다. 참 모순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월요일 부터 금요일, 혹은 주말까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난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끼니를 거르고 내 몸을 혹사시키며 일에 몰두했다.


이렇게 까지 일을 죽어라 할 수 있었던 건, 그 시절의 내겐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주 크게 다가왔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자리가 있다는 건 엄청나게 축복받을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청년실업 시대에 암담하기만 했던 내 취준생 시절엔 내가 일인분 몫을 할 수 있는 일자리, 달마다 내 노동에 대한 댓가를 적게나마 받을 수 있다는 만족감, 더 이상 부모님의 눈칫밥을 고봉으로 떠다 먹어도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등이 그저 감사할 뿐이였다. 그러기에 더욱 이런 고마움들은 내가 시달려야만 했던 모든 힘듦을 중화시켰다.




지금 많이 놀러다녀!
직장 들어가면 그런것도 다 끝이야!

대학시절, 먼저 취업한 선배들은 내게 흔히들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가 하지 못할 목록'에는 우리가 학생이였을 땐 아무렇지 않게 했던 것들로 가득차있었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 즉흥적으로 떠나는 바다 여행. 평일에 한적한 쇼핑몰에 가서 쇼핑하기, 하물며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기 등등...


하지만 난 주위의 어른들이 내게 다른 말을 해주길 내심 바랬다. 직장의 문턱을 넘는 순간 너는 자유롭지 않을거란 말 대신, 앞으로의 너의 인생엔 더 많은 즐거움과 경험이 기다릴 거야. 나이가 들며 생긴 연륜과 일을 하면서 얻은 경제력으로 더 넓은 세계를 탐험할 수 있을거야 같은 말들.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그 선배들의 말들은 잔인하리만큼 현실이였다. 그도 그럴게, 근처에 있는 병원이나 우체국을 가려고 반차를 내야하는 경우도 빈번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점점 내 시간이 내것이 아닌 회사생활에 익숙해졌고, 어느샌가 나 또한 현실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지금이 좋을 때야' 따위의 말을 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평생 살 수 있을까?

월요일이 끝나면 월요일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화요일이 찾아왔다. 그리고 월요일의 피로를 떠안고 화요일에 회식이나 야근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틀의 피로를 떠안고 또 수요일을 맞이해야 했다. 평일동안 쌓인 피로들을 풀 수 있는 건 주말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주말은 친구, 가족들과의 여가시간이 아닌 하루종일 못다 잔 잠을 자는 날들이 되었다. 결국 눈깜짝할새에 시간이 지나고 남는 건 개콘 엔딩곡을 들으며 처참함에 젖는 주말 저녁이었다.  


이건 마치 아주 지루하면서도 슬픈 한편의 생로병사 다큐멘터리를 반복해서 보는 것과 같았다. 피곤이 가시지 않아 커피를, 술이 깨지 않아 숙취제를, 소화가 되지 않아 소화제를 삼시세끼 챙겨 먹었던 난 어딘가 내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생로병사에서 다루는 병의 주 원인들이 잦은 회식, 불규칙한 식습관,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 축적 등인것 처럼. 성인병이라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의 숙명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분명 내 일을 좋아했다, 처음엔. 하지만 점점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일은 내게 점점 내 숨통을 짓누르는 존재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주하는 것은 설렘이 아닌, 무언의 압박과 두려움이었다. 내일은 또 어떤일을, 또 그 다음 날은 어떤 일을 내가 준비해야 할까, 견뎌야 할까, 얼마나 더 피곤할까, 얼마나 더 내 인생을 희생시켜야 할까. 내 인생은 현재가 아닌 빈틈 없는 미래들로만 가득찼다.


가끔은 내가 이 일을 싫어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나는 내 일을 하는 것을 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나는 일은 하되, '죽어라' 하긴 싫었던 것이다.




성공하려면 그 일에 미쳐야돼.

한번씩 성공한 이들의 인터뷰나 특강을 보다 보면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걸 발견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 분야에 미친다는 말은 즉, 그 분야에 대해 누구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고 그로 인해 성장한다는 뜻일테니까. 하지만 일에 미친다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는 사뭇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여유를 가진다는 건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건 그 시간만큼 남에게 뒤쳐진다는 뜻이고, 남에게 뒤쳐진다는 건 경쟁에서 진다는 것이고, 남들과의 경쟁에서 진다는 건 인생에서 실패한다는 뜻이였다.


이런 사회적 통념에 의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일이나 성공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버린 것 같다. 일을 (직업이 아닌) 커리어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만큼 열심히 하지 않거나 성공하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정말 일에 미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부분을 포기하고서라도 정말 열심히 일하여 개인의 목적을 성취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일에 미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까지, 일에 미치라고 종용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나는 다들 그러고 사니까 나도 그래야 하는줄만 알았다. 내가 죽어라 해야했던 1인분의 몫이, 남들이 다 가지고 사는 1인분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영국에 와서야 알았다. 내가 한국에서 했던 일들은 결코 1인분 몫이 아니라, 어쩌면 3-4인분 몫도 거뜬한 패밀리 세트 분량이였다는 것을.

 


영국 2016 여름, 지나가다가 너무 예뻐서 찍은 아파트


누구나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영국에 와서 가장 많이 놀랐던 한국과의 근로환경 차이는 바로 '여가 시간에 대한 존중'이였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여가 시간은 항상 일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


실제로 나는 매일 칼퇴에 하루에 8시간 x 주 5일 = 40시간으로, 딱 정해진 만큼만 일한다. 정말 가끔 초과근무를 한다고 해도 야근 수당이나 홀리데이 특별 수당은 꼭 챙겨받는다. 개인의 시간에 대한 중요함을 다들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 근로법의 기준은 매우 엄격하고 사내 직원들의 분위기 또한 그렇다. 5시 반 이후면 대부분 짐을 싸서 집에 돌아가거나, 옆자리의 사람이 남아있어도 퇴근 안하냐고 서로에게 항상 물어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격이였다. 이전까지의 내 삶과는 참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생기면 내가 미리 예정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데이트, 가족 행사는 항상 뒷전이였다. 그리고 주위의 분위기 또한 그랬다. '나 일 때문에 바빠서 못갈것 같아' 라고 하면 다들 더 이야기 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다는 식으로 답했다. 그렇게 모두가 암묵적으로 용인했던 분위기와 달리 이곳 영국에선, 다들 인생엔 일보다 우선할 것이 있다는 것을 나에 비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직업이 내 삶이고
내 삶이 직업이 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영국에 살다보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였다. 그리고 아마 이 생각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 같다. 그래선지 예전의 나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내가 잊고 있을 뿐, 내 시간은 사실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애초부터 내 인생이고, 내 시간이고 나만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인데. 희생하지 못하는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걸 내 의지와 상관없이 뺏어가려고 하는 누군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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