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세 가지 자유와 두 가지 극단

그리고 현명함과 어리석음에 관하여

by 임지성의 생각



(quod videtur)


우리가 "자유"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것들 관하여


1 - 자유롭다는 느낌, 기분, 상태: e.g. 해방감, 자신감, 등등 ... .


2 - 의지한 대로, 의도한 대로 행위할 수 있는 능력: e.g. 신체적 자기 결정 능력, 정신적인 건강, 공감 능력, 말하기 능력, 등등 ... .


3 - 이상의 상태 및 능력에 대한 실질적인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e.g. 경제적 자유, 법적 신분의 안전함, 외부 위협으로부터의 자유, 등등 ... .


극단적인 관점에서 생각된 우리가 "자유로운지의 여부"에 관하여


1 - 운명, 구조, 작용-반작용, 인과사슬, 등 법칙적인 메커니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관점(결정론)


2 - "생각한 대로", "말하는 대로", "의지만 강하다면", 등의 정신론적이거나 주의주의적인 관점


비교적인 관점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층위적 개념적 구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 - 아마 이 구분들은 대체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을 것이고, 적어도 서로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신체의 움직임이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어떤 현상이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에 대하여 의미/의도를 파악하고 싶을 때, 마음처럼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능력의 부재) 자유롭다는 느낌, 기분, 상태를 향유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능력의 부재"와 같은 내재적 요인의 작용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능력의 행사를 실질적으로 억압/억제하는 외부적인 제약이 있더라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감"을 자유로운 상태에 대한 감각과 느낌이라고 두게 되면, 결국 그러한 감정적 기분적 의미는 내재적 요인에 대한 것이 되었든, 외재적 요인에 대한 것이 되었든 다른 것을 지향함으로써 실체를 갖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현상학적인 분석에 우리가 특정 기분을 느끼게 되는 일의 배후에 신경학적 기전(전기적 화학적 신호)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로 대답한다면, 이는 (무의미하지는 않겠지만; v.i.) 다소 초점을 벗어나는 말일 것이다.


다음은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2 - 인간의 인식적 활동은 "규칙"을 추상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했으며, 이러한 인식적 활동은 학문이라는 제도로 고도화되었다. 그리고 무릇 진지한 학문이라면 대체로 현상과 의견들 속에서 이러한 "규칙"들을 식별하고 엄밀하게 기술하는 일 기초적인 목표로 삼는 편이다. 그런데 학문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인 동시에 연구되는 현상들이 인간, 그리고 인간적인 다른 활동들과 맺는 맥락적인 관계를 "취급할 수 있다." 그래서 각각의 전문 분야에서 식별하게 되는 규칙들이 매우 확고하고 불변하는 성질을 갖는 것으로 식별되고 기술된다면, 그것이 인간의 내적 상태의 전부 혹은 일부를 직접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거나 간접적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방식이 있을 가능성에 대하여 "논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엄밀한 관찰과 분석을 통해 수행된다면, 우리는 이를 정당한 학술적인 관점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과학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는 의도치 않게도 과거에 신화적으로 지워진 "운명"의 멍에를 자연적으로 부여된 "법칙"의 작용으로서 재인식해 나가는 중일 수 있다.(i.e. "자연화된 인식론"[naturalized epistemology])


3 -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결정적인 것들"(그것이 운명이든 법칙이든)에 대한 우리의 이해나 생각은, 그것들의 존재나 성립 자체와는 무관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게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게 되기도 하는 방식으로 변동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험은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과 달리,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선명하여 "자유"에 대한 우리 상식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상식에 입각해 삶을 꾸리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며, 책임을 지고, 여유를 찾는 등 여럿을 실천한다.

그리하여 실천적인 층위에서 결정론적인 "기술"(discription)은 적어도 그러한 규칙의 "응용"이라든지, 그 일환으로서의 "설계" 혹은 "조작"이라든지 하는 구체적인 실천까지는 배제하지 못한다. 이는 정신론적인 태도와는 또 다른 것이다.


4 - 실용적 실천적인 관점도 있지만, (이러한 관점에서의 "자유"는 "창의성"이나 "다양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최소한 어떤 법칙을 크게 신뢰하는 입장에서 이와 상충하는 것 같은 "자유"를 논한다는 것은 "신비"(myth) 혹은 "신화론"(mythology)로의 회귀가 아니라면, 정신론적인 신념을 유지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 경우 이러한 "태도"나 "신념"은 적극적인 실천의 동기가 되어줄 수도 있고, 처지에 만족함으로써 "정신적 자유"(安分知足; 안분지족)를 누린다든지 하는 방식으로도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sed contra)


그것이 전부인가?


1 - 법칙은 "당위"(ought to be)를 정해주지는 않는다.(e.g. 데이비트 흄의 "존재-당위의 문제"[Is-Ought Problem] c.f. G. E. 무어의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


2 - 그러나 "법칙들"은 (그것들이 정말 실제로 작동하는 법칙인 동안) 우리의 "의제들"(agendas) 혹은 "명분들" 즉, 여러 "당위들"에 대하여 고고하고 엄연한 방식으로 건제할 것이다.


3 - 공교롭게도 우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이 착각이거나 마음의 상태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아이디어들의 출현은, 외재적 조건들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의 크기와 무관하지 았았던 것 같다. 예컨대, 고대 염세주의 철학은 당대의 제국 팽창이나 역병 등과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한 불확실성과 무관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처럼 제약에 저항하는 태도를 지닌 철학은 계몽주의 혁명의 끝물에 등장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4 - 나는 자유가 있는가/없는가, 결정론적 법칙들이 있는가/없는가 식의 전통적인 논의 틀은 이제 핵심을 비껴나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질문을 예리하게 한다면 이 게임이 시소게임보다 서핑 게임에 가깝게 느껴져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핵심은 학술적으로 톺아내는 모든 규칙들이 만사를 '적극적으로 결정해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런 규칙들은 우리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방식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규칙 자체가 수적으로 다양하고, 작동하는 방식은 여러 층위에 분산되어 있으며, 상호배타적이기는커녕 양립 가능한 동시에 상호의존적이거나 되먹임의 관계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의 사유와 행위, 그리고 다른 형태의 지능과 행위들 역시 여기서 결과로서만이 아닌, 원인으로서도 제 몫을 담당하고 있다.


5 - 이렇게 복잡한 인과 구조 속 행위자의 적극성을 긍정하게 되면, 과학, 정치, 공학은 여전히 서로를 배제하지 못하는 활동처럼 보인다. 나는 이러한 구획들의 경계면이 선명하지 않더라도 이를 신중하게 취급하거나 투명하게 인정하는 이들이 더 좋다. 왜냐하면 고의성이 짙든, 옅든, 말은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달 범위와 속도 자체를 통제하기 어려운 세태 속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가 어떤 말을 함으로써 어떤 이득을 취하게 되는지 따위의 의심을 거둘 수 없는 세계가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려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늘 어렵고 어지러웠을 수도 있다.


슬라보예 지젝의 Less Then Nothing의 서문에서 언급된 '세 종류의 어리석음(tritie idiocy)'이 떠오른다.


stupid-imbecle-moron이었던가.


논리적으로 탁월하지만 모호하고 다원적인 현실 세계의 맥락에 도통 적응 못하는 유형의 '멍청이'(stupid)가 있다면, 철저하게 상식의 대변자 노릇을 자처하는 유형의 '바보'(moron)도 있고(여기서 지젝은 대타자의 표상인 상징계의 질서에 몰아적으로 순응하는 이들을 일컫는 것 같다.), 상식적인 진리 같은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 잘 알면서도 자폐성을 선택하지는 못하겠어서 상식적인 혼돈 가운데 살면서도 그것에 끝내 순응하지는 못하는 '천치'(imbecle)들도 있는 법이다(라틴어 부정 접두사 im + 막대/지팡이를 뜻하는 라틴어 명사 baculum의 조합으로, 이 글[Less Then Nothing의 서문]에서는 기대지 못하는/않는 자를 뜻하도록 쓰이고 있다.).


지젝의 이런 단순화가 타당하다면, "어리석음"이란 무엇일까.


이 책에서 강조하는 헤겔의 개념인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on)을 통해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리석음"이 "현명함의 부정"여야 할까? 아니면 반대로 "현명함"이 "어리석음의 부정"이어야 할까?


멍청이의 반대도 바보고, 바보의 반대도 멍청이라면, 그리고 양자의 부정 또한 천치와 같다면, 어리석음이 또한 결국 실체 없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모두 나름대로의 현명함으로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아무튼 자연의 법칙이 되었든, 사회의 규칙이 되었든, 신의 섭리가 되었든,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어리석을지/현명할지까지는 결정해주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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