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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나이 먹고 미국 룸메 싸움에 새우등 터짐

역시 사람은 혼자 살아야...

by 진달


니 나라로 돌아가!!! (Go back to your country)



새벽 1시, 방 건너편 거실에서 또렷하게 들려온 이 문장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또 시작이네.' 문제는 이 정도 강도의 욕설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닥쳐! (Shut the fxxk up!)
니 몸이랑 네가 하는 음식에서 냄새나

여기 2명의 룸메가 있다. A는 국제학생, V는 미국인이었다.




| 제1차 룸메대전


A는 새벽 2-3시경에 계속해서 소음을 내서 우리를 깨우고는 했다. 말도 없이 친구 혹은 앱으로 만난 데이트 상대를 집에 데려오기도 하고, 술 먹다가 혹은 담배를 피우다가 혹은 멘털이 깨져서는 우는 소리 및 새벽에 요리하다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기도 했다. 당시 첫 학기를 지내고 있던 나는 새롭고 희망에 찬 마음이었지만, 개강 첫 주부터도 꽤나 엉망진창이었던 이 친구의 모습을 보고 좀 당황했다. 처음에는 위로도 해주고, 고민 얘기도 들어주고 하다가도, '내가 이러려고 내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미국에 온 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져 갔다.


나는 방에 있는 시간은 잠을 잘 때 혹은 간간히 요리를 할 때뿐이었다. 대부분의 날들은 아침 일찍 등교해서, 밤늦게 귀가해 씻고 자고는 했다. 딱 취침 시간 동안만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하기를 세 번째, 또 한밤중에 우당탕탕 소리가 들린다.


이쯤 되면 선을 넘었다. 몇 번을 점잖게 말해도 알아먹지를 못하는 27살 먹은 다 큰 어른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화가 조금씩 치밀어 올랐다. 한 시간이 지난 새벽 4시까지도 그녀는 방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건너편에서 문이 쾅 열리더니, 또 다른 룸메 V가 등장했다. 그리고 위의 강도 높은 욕설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룸메 대전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나는 갈등을 꽤나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느냐만은, 나는 최대한 상대방을 이해하고 어르려고도 해 보고, '그럴 수 있지'라는 말로 내 화를 가라앉혀보려 부단히 애를 쓰는 사람이다. 좋게 말해서 안 될 때는 어느 정도 매우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고는 알고 있지만, 그렇게 강하게 선을 긋는 것은 (더군다나 영어로) 아직 좀 미숙한 것 같다. 그래서 A의 일관된(?) 민폐도 신기했고 (어이없는 방향으로), V의 강렬한 분노 표출도 신기했다. 내 인간군상 데이터베이스에 단숨에 2개의 새로운 유형이 추가되었다.


어쨌든, 룸메 V의 욕설은 A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불을 지폈고, 그때부터 그 둘은 얼굴만 맞댔다 하면 으르렁댔다. 말이 '으르렁댔다'지, 진짜 살벌했다. 나는 저 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집에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그냥 이렇게 된 김에 학교에 더 오래오래 있으면서 공부나 열심히 하자, 싶었다.


룸메 V는 나와 같은 날에 입주한 학생이다. 우리는 사이가 매우 좋았고, 주말에는 같이 공부를 하러 나가기도 하고, 요리도 해 먹고 운동도 하면서 꽤나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와중, 룸메 A와 그런 사건이 있고 나서 V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도 A에게 화가 났던 건 맞지만, 그 분노를 욕설로 표현하고 거기에 더해 사람 자체에 대한 인신 모독에 무지성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저건 별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좀 잔인했다. 한동안 그렇게 지내던 A와 V는 서로를 갉아먹기 시작했고, 결국 안 그대로 유리멘털이던 룸메 A는 breakdown 이슈로 계약이 만기 되기 전 방을 나갔다.



| 제2차 룸메대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나갔으니 이제는 괜찮겠지?


아니,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이제 나와 룸메 V, 두 사람뿐이었고 한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곧이어 문제가 터졌다.


룸메 A와 V가 크게 싸운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는 바로 '청소'였다. A는 결벽증 수준으로 엄청나게 깔끔했다. 정리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요리를 하고 난 후의 기름때나, 설거지, 바닥 청소, 이런 종류의 위생은 끔찍이도 신경 썼다.


반면 룸메 V는 정반대였다. 설거지는 쌓아놓기 일쑤였고, 바닥 청소를 하는 건 1년 가까이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생선 요리를 자주 해 먹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튀는 기름때를 단 한 번도 닦아놓은 적이 없었다. 그녀의 빨래는 빼달라고 말할 때까지 건조기에 그대로 처박혀 있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겨울방학이었고,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날씨였다. 나는 그때 집에 있었고, 그녀는 가족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방학을 맞으러 갔다. 근데 나가면서 본인 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간 것이다. 덕분에 그녀 방문 아래로 찬 바람이 슝슝 들어왔고, 결국 내가 따로 관리인을 불러서 그녀가 잠근 방 문을 열고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V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이건 아주 작은 실수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같이 살기에는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걸 그나마 룸메 A가 상쇄해주고 있었다는 걸 그녀가 나가고 나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몇 번 좋게 좋게 말했었다. 나는 건조기에 처박혀 오랫동안 방치돼 있는 그녀의 빨래들을 손수 꺼내 거실의 소파에 올려놓고는 했었는데, 그게 쌓이고 쌓여 무덤이 되어갈 무렵 한 번씩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V야, 네 빨래 좀 가져가지 않으련?"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아 미안, 바빠서 계속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다가 못 치웠네. 이따가 치울게"


바빠서..? 이따가...? 누군 안 바쁜가. 그 말을 할 시간에 지금 치우라고,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나도 참 답답하지. V는 자기 방만 깔끔하게 치우면서 공용공간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나도 그냥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 참고, '그냥 내가 치우고 말지' 하면서 치우고는 했다. 그렇게 가스레인지를 닦고, 청소기를 돌리고, 건조기에 들어있는 빨래를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그러다가 또 현타가 세게 왔다. 내가 무슨 베이비 시터도 아니고, 이렇게 덜 된 사람과 살아야 하나.


거울치료도 시도해 봤다. 아예 손도 안 대고 가만히 놔둬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대충 이주일 만에 시궁창이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건조기 돌리는 것도 까먹고 빨래를 그대로 방치해서, 나는 건조기를 쓰지도 못하게 해 놓았고 그녀의 빨래에서는 쉰내가 나기 시작했다. 청소기는 쓰고 선도 정리해놓지 않고 거실에 그대로 내동댕이 쳐놨으며, 설거지를 하지 않은 그녀의 그릇들에 담긴 물의 색깔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 그럼 룸메랑 '잘' 살 수는 없는 걸까


자기반성을 해보자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학업적으로 나의 첫 1년의 석사생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성적도 잘 받았고, 인턴도 성공적으로 구했고, 교수님들과도 친해졌다. 하지만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건 나의 정신상태에 매우 큰 악영향을 끼쳤다. 집에 들어가기가 불안했고, 또 둘이 싸우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기까지 했다. 여러 가지 갈등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며 그럴 때마다 내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할지를 생각하느라 정신적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진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엄청난 에너지 낭비였다.


같이 사는 사람을 바꿀 수는 없고, 바뀔 의지도 없어 보이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밖에. 다행히도 나의 여름 인턴 기간은 학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이었고, 나는 기말고사를 치른 후 뒤도 안 돌아보고 모든 짐을 정리해서 '그래도 즐거웠다'는 쪽지 하나 남긴 채 그 집을 영영 떠났다.


결론적으로, 룸메와 평화롭게 잘 지내기 위해서는 꽤나 단호하고 상세한 규칙들이 필요하다. 집에는 손님을 데려오지 않기/ 혹은 손님을 데려오기 전에 미리 알려주기, 설거지는 생길 때 바로바로 치우기, 공용공간 청소는 순번을 돌아가면서 하기, 쓰레기 버리는 주기와 순서는 정해놓기, 청소기와 건조기는 사용 후 바로바로 비우기, 밤 11시 이후에는 조용히 하기, 여름/ 겨울에는 온도를 어느 정도로 맞춰놓기 등등.


이런 규칙을 미리 정하지 않을 때는 위의 에피소드와 같은 사달이 충분히 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상식이 아닐 수 있는 거다.


한국에서 살 때는 이런 종류의 룸메이트 문제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총 7년을 기숙사 생활을 해왔다. 룸메가 1명부터 3명까지 다양했다) 그래서 내가 좀 안일하게(?) 접근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다. 다들 좋게 좋게 잘 지내고 싶어 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룸메 이슈는 내가 경험한 그 이상이었다. 룸메는 친구이기 이전에 같이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하우스메이트이고, 서로의 쉼을 지켜주기 위해 규칙은 반드시 필요한 듯하다.


그냥 이번에 좀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하는 게 맘 편하겠지만, 한 번 겪어봤으니 이제 미래에는 조금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번이 있다면, 그때는 내가 원하는 생활방식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서로 맞춰나갈 수 있도록 의사소통에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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