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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 Sep 28. 2020

1.2 도서관, 최고의 놀이터

한국에 돌아와 영어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습을 했던 것에 비하면, 캐나다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에는 영어 학습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8년은 한국에 해외여행이 허가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나의 부모님은 공부보다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고 여러 경험을 쌓는 것에 더 신경 쓰셨다.

아버지는 낡은 갈색 왜건을 한 대 장만했고, 나의 가족은 그 차로 정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내비게이션도, 구글맵도 없던 그 시절, 종이로 된 지도 하나에 의지해서 미국까지 오고 갔던 걸 생각하면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던 부모님이 얼마나 신나고도 긴장했을까 궁금하고 고마워진다.


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이렇게 신나게 여행 다니며 놀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환경 덕분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당시 한국은 해외 방문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때문에 어렵게 온 외국이니 “영어 공부 제대로 하고 가자” 보다는 “되도록 많은 경험을 하자”는 마음이 더욱 컸던 게 아닐까.


그런 마음이 실천될 수 있었던 건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이 서울이 아니라 부산이라는 점이 아마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서울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자란 부산은 당시 조기교육, 선행 학습의 열풍이 과하지 않았다.

내가 공부를 안 하는 편에 속하는 초등학생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다. 시험공부는 전과와 문제지를 풀면서 했고, 방문 학습지를 간신히 푼 정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행스럽게도 캐나다에서 지내는 동안 언니와 나는 학습보다는 경험과 놀기에 초점을 두고 정말 신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ESL 수업을 들으면서 조금씩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지만, 오후의 수업은 꽤 오랫동안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작은 도시의 순한 아이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주었고 덕분에 친구들도 제법 사귀었다.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쓰고 그린 그림일기)



학교는 늘 이벤트로 가득했다.


돌아가며 특별 활동 반을 바꿔가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나는 피자 만들기 수업을 들었고 언니는 스타킹 인형을 만드는 수업을 듣고는 마녀 인형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말이 자유롭게 통하지 않았던 내게 그런 특별 활동과 ESL 수업은 내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영어를 익힐 수 있는 좋은 도우미 역할을 했다.



학교 생활과 교과 외에 이후의 내 삶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경험이 있다.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한 경험이다.


책을 좋아하는 엄마 덕에 나도 언니도 어렸을 때부터 책을 쉽게 접하고 좋아했다.

캐나다에서도 엄마는 지역 도서관을 몇 군데 찾아서 우리를 자주 데려갔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캐나다 도서관은 물론 어린이 책 구역이 전부다. 하지만 어린이 도서 섹션이 꽤 넓었고, 아이들이 편하게 앉아 뒹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


도서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멀티미디어 자료들이다. 당시 멀티미디어는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영상과 카세트테이프가 전부였다. 하지만 책을 읽어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 (당시엔 오디오북이라는 표현이 없었던 것 같다)는 나와 언니에겐 센세이셔널한 학습 도구였다.


집에 돌아오면 언니와 인형 놀이를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책을 들었다.

집에는 한국인만 네 명이었지만 원어민이 읽는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신이 났다.


엄마와 함께 우리는 자주 도서관을 찾았고, 보고 싶은 책과 듣고 싶은 테이프를 직접 골랐다. 어린이 책 코너에서 한참을 뒹굴고 돌아다니며 책을 읽다가 색칠 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자연스러웠다.

도서관과 이렇게 친해진 나에게 도서관에서 나는 책 냄새는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읽기를 통한 영어 학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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