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위에 글쓰기
저는 고객, 시장, 기술 현황을 연구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고객의 삶을 바꾸면서 회사는 수익도 낼 수 있는 사업 방향을 찾아 실제 사업을 하는 부서에 제안합니다. 쉽게 말해 미래 연구 또는 (정확히는 아니지만) 사내 컨설팅에 가까운 일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일한 결과물은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위에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파워포인트라는 특성 때문에 제 보고서에는 텍스트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각종 도표, 다이어그램, 이미지, 일러스트 등 시각적인 자료들이 총동원됩니다. 이런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면 글의 형식, 논리나 구성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의 디자인이나 그 안의 정보, 지식, 데이터 등의 컨텐츠가 더 중요해 보이기 마련이죠.
작지만 하나의 팀을 맡고 있는 저는 후배 연구원들과 함께 일하고, 수차례 면담을 진행하면서 그들과 제 생각 사이에 작은 간극이 존재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보고서에 들어가는 컨텐츠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업계 용어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저는 비록 보잘 것 없고 미미한 컨텐츠만 주어졌을지라도 참신하고 좋은 제안을 할 수 있어야 이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러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에 대해 정리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웬만한 사전이나 통역에 이어 지성의 영역까지 AI가 점령하는 시대가 다가옵니다. 이러한 시대를 목전에 두고 정보, 지식, 데이터 누적과 보유만을 목표로 경력을 쌓다보면 언젠가 허탈해지지 않을까요? 정보, 지식, 데이터를 열심히 공부하고 분석하는 것은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기 위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내용들은 언제나 멈추지 않고 변화하고 흐르며 사라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어떠한 분야와 마주쳐도 창의적인 결과를 낼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2가지 정도의 능력이 밑바탕에 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요인을 발견할 줄 아는 통찰력입니다.
사람은 집이 흔들리고, 땅이 파괴되고 나서야 지진을 알아챕니다. 그러나 사람보다 작은 새나 곤충은 미세한 땅과 대기의 변화로 지진이 다가옴을 알아채고 피하곤 하죠. 세상의 모든 변화와 혁신이 이미 존재하는 정보와 지식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작은 움직임을 간파하여 혁신으로 연결한 사례들이 많습니다. 최초로 걸으면서 음악을 들게 해준 워크맨이라는 상품을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심오하고 복잡한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개발되었을까요? 작은 컨텐츠만 보고도 중요한 것을 간파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관찰력, 같은 현상도 다르게 볼 줄 이는 관점의 변화, 창의적인 사고방식에 기반한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쉽고 간결하며 논리적인 글쓰기 능력입니다. 같은 현상도 더 이해하기 쉽게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보고서는 프리젠테이션이 없어도,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마저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방대한 데이터를 치밀하게 분석했더라도 쉽고 간결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또한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다거나 노력한 과정을 드러내고 싶어서 백과사전과 같이 온갖 데이터와 텍스트로 빼곡하게 채우는 것도 읽는 이를 배려하지 않은 보고서라 하겠습니다. 보고서 전체 구조는 서론, 본론, 결론의 순서를 갖추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서론, 본론, 결론의 각 부분 안에도 하고자 하는 요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는 구성되어야 합니다. 각 부분에서 쓰이는 문장들도 쉽고 간결해야 합니다. 주어와 술어의 어긋남이나 동일한 어휘나 문장의 반복이 없어야 합니다. 도표, 이미지, 일러스트들은 이러한 원칙 하에서 더 쉽고 정확한 이해를 거드는 역할로 쓰여야 합니다.
통찰력과 글쓰기 능력은 미래 연구 및 이를 기반한 보고서 작성에서 중요한 두 축에 불과합니다. 이미 언급한 관찰력, 관점변화, 창의력, 글쓰기의 사소한 기술 등이 뒷받침 되어야겠죠. 앞으로 저희 경험에 기반하여, 이러한 세부 역량들에 대한 제 생각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