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Why)’의 미학과 현대미술의 존재론적 전환

동서양디자인연구소

by Quantum 김남효

‘왜(Why)’의 미학과 현대미술의 존재론적 전환

The Aesthetics of “Why” and the Ontological Shift in Contemporary Art


동서양디자인연구소, 김남효 교수, Ph. D.


1. 예술의 패러다임 변화: 재현의 기술에서 존재의 근거로


예술의 역사는 시대마다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달리하며 변모해 왔다. 19세기 중반 이전의 고전적 순수미술(Fine Art) 시기에는 자연의 모방과 재현, 즉 미메시스(Mimesis)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지향점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현대미술(Contemporary Art)은 이러한 시각적 재현의 굴레에서 벗어나 ‘왜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단계에 진입했다.

순수미술이 조화, 균형, 비례와 같은 미적 기준을 통해 관람객에게 망막적 쾌락과 정서적 고양을 선사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현대미술은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아름다움의 정의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실험적 성격을 띤다.

이러한 전환은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예술의 목적 자체가 ‘어떻게(How) 보여줄 것인가’에서 ‘왜(Why) 존재해야 하는가’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현대미술가는 장인적 기술의 숙련도에 의존하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매체와 개념이 동시대를 관통하는 지배적 담론이나 사회적 모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닌, 그 이면을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와 철학적 사유를 추적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2. 서양 현대 미학의 지평: 아서 단토와 조지 디키의 이론적 공헌


현대미술의 ‘왜’를 설명하는 서양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적 틀 중 하나는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예술계(Artworld)’ 개념이다. 단토는 1964년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목격한 후, 시각적으로는 슈퍼마켓의 일반 세제 상자와 구별되지 않는 이 물건이 왜 예술 작품으로 대우받는지에 주목했다. 그는 일상적 사물과 예술 작품을 가르는 기준이 눈에 보이는 ‘시각적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예술로 인정하게 만드는 ‘예술적 이론의 대기’와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라고 주장했다.

단토에 따르면, 현대미술은 더 이상 시각적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철학’의 단계에 도달했으며, 이를 ‘예술의 종말’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예술의 소멸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선형적 역사가 끝나고 모든 표현 방식이 허용되는 ‘다원주의’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한 것이다. 현대미술의 ‘왜’는 이제 작품 자체가 아닌, 그 작품을 둘러싼 담론과 해석의 체계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게 되었다.

조지 디키(George Dickie)는 단토의 통찰을 발전시켜 ‘제도론적 예술 정의(Institutional Theory of Art)’를 구축했다. 디키는 예술 작품을 ‘예술계를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감상의 후보자라는 지위가 부여된 인공물’이라고 정의했다. 초기에는 이러한 지위 부여 행위를 다분히 인위적인 절차로 보았으나, 이후 수정된 이론에서는 예술을 사회적 관행과 문화적 실천의 산물로 파악했다. 디키의 관점에서 현대미술의 ‘왜’는 작가가 사회적으로 형성된 예술의 틀 내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위를 위치시키는지, 그리고 예술계라는 공적 네트워크가 이를 어떻게 수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3. 장자 철학의 시각에서 본 현대미술의 본질: 무용지용과 소요유

서양 미학이 제도와 담론을 통해 현대미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면, 동양의 장자(莊子) 철학은 존재의 역설과 자유라는 관점에서 현대미술의 근원적 ‘왜’를 통찰한다. 장자 철학의 핵심 중 하나인 ‘무용지용(無用之用)’은 현대미술이 왜 실용적 가치에서 벗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강력한 논거를 제공한다. 세속적 관점에서 재목으로 쓸모없는 뒤틀린 나무가 도끼에 찍히지 않고 천 수를 누리며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하듯, 현대미술은 자본주의적 유용성과 도구적 합리성에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둠으로써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지탱하는 ‘큰 쓰임(大用)’을 획득한다.

현대미술이 던지는 “이것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사물을 오직 ‘도구’로만 보던 인간의 편협한 인식을 전복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서 말하는 만물의 평등한 가치와도 맞닿아 있다. 일상적인 사물을 예술의 맥락으로 끌어올리는 레디메이드(Ready-made) 기법은 사물에 부여된 고정된 용도를 제거하고, 그 존재 자체의 본성을 드러내게 한다. 이러한 과정은 관람객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하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기폭제가 된다.

또한, 현대미술가가 기존의 미적 규범과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행위는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비유될 수 있다. 소요유는 어떠한 외적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노니는 경지를 의미한다. 현대미술의 ‘왜’는 결국 작가가 고정된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존재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신적 노늚은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되며, 현대인들이 효율성의 전쟁터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실존을 성찰하게 만드는 정신적 쉼터(그늘) 역할을 수행한다.


4. 현대미술과 순수미술의 구조적 대비: 창작 동기와 목적의 심층 비교

현대미술과 순수미술의 차이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진영이 지향하는 가치 체계의 구조적 차이를 살펴봐야 한다. 전통적인 순수미술은 ‘미(美)’라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수렴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때의 예술은 신의 영광을 기리거나(종교적 목적), 국가의 권위를 세우거나(정치적 목적), 혹은 자연의 조화를 재현함으로써 인간의 정서를 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숙련된 기술과 값비싼 재료, 엄격한 형식미가 필수적인 요소였다.

반면 현대미술은 ‘미’를 넘어선 ‘의미’와 ‘개념’의 발산을 추구한다. 현대미술가는 아름답지 않은 것, 심지어 불쾌하거나 추한 것조차 예술의 영역으로 수용한다. 이는 예술이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고, 소외된 가치를 조명하며, 지배적인 권력 구조를 해체해야 한다는 비판적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미술은 ‘작품’이라는 완결된 결과물보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파장’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5. 서양의 대표적 사례: 개념의 승리와 제도적 전복


현대미술의 ‘왜’를 가장 선구적으로 보여준 사례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이다. 특히 1917년 작 ‘샘(Fountain)’은 예술의 패러다임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뒤샹은 상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를 거꾸로 세우고 ‘R. Mutt’라는 가상의 서명을 남겨 전시장으로 가져왔다. 이 행위는 예술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공산품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선언이었으며, 예술의 본질이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선택하는 의지’에 있음을 증명했다. 장자의 관점에서 이는 소변기라는 사물에 부여된 고정된 ‘용도’를 말소하고, 그것을 예술이라는 ‘무용’의 영역으로 전이시킴으로써 대상이 지닌 새로운 가능성을 소요(逍遙)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의 상징물을 예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es)’는 1960년대 미국 소비 사회를 지배하던 세제 박스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정교하게 복제한 작품이다. 워홀은 이를 통해 ‘고급 예술’과 ‘저급 문화’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예술 작품이 가진 희소성과 아우라를 해체했다. 단토가 지적했듯, 워홀의 작품은 예술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철학적 자의식’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 워홀의 ‘왜’는 대중의 일상이 곧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다원주의적 긍정이며, 이는 모든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장자의 ‘제물(齊物)’ 사상과 그 궤를 같이한다.


6. 중국의 대표적 사례: 전통의 파괴를 통한 동시대적 저항


중국의 현대미술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는 서양의 개념미술적 방법론을 중국의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상황과 결합하여 강력한 ‘왜’를 도출해 낸다. 그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인 ‘한나라 도자기 떨어뜨리기(Dropping a Han Dynasty Urn)’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유물을 바닥에 던져 박살 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작업은 과거의 가치에만 매몰된 중국 사회와 문화대혁명 당시의 전통 파괴를 동시에 풍자한다. 그는 도자기를 깨뜨림으로써 박제된 유물을 살아있는 현대미술의 의제로 전환했으며, 파괴라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이웨이웨이의 작업 세계에서 ‘왜’는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과 개인의 자유 수호라는 명백한 사회적 목적을 지닌다. 그는 감시와 검열을 상징하는 CCTV, 가위, 새(트위터 로고) 등을 도자 매체로 재현하거나 설치함으로써, 현대 중국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를 시각화한다. 이러한 활동은 장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이라는 세속적 유용성에 굴복하지 않고 ‘쓸모없음’의 가치를 통해 권위의 허구를 폭로하는 ‘큰 쓰임’의 전형이다. 그는 구금과 탄압 속에서도 자신의 연행 과정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등,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퍼포먼스를 통해 예술가의 사회적 책무를 실천한다.


7. 한국의 대표적 사례: 단색화와 수신(修身)의 미학


한국의 단색화(Dansaekhwa)는 서구의 추상 회화나 미니멀리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철학적 배경을 가진다. 박서보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들에게 예술은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자신을 지우고 정신을 닦는 ‘수신(修身)’의 과정이다. 박서보의 ‘묘법(Ecriture)’ 시리즈는 한지를 물에 불려 캔버스에 붙인 뒤, 물감이 마르기 전에 연필로 무수한 선을 긋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을 수반한다.

이러한 행위의 ‘왜’는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를 비워냄으로써 자연의 순리에 다가가기 위함이다. 박서보는 “그림은 나를 비워내는 장소이자 도구”라고 말하며, 작품을 ‘수신의 찌꺼기’라고 표현한다. 이는 장자의 ‘좌망(坐忘)’ 혹은 ‘심재(心齋)’의 경지와 맞닿아 있다. 마음을 굶기고 나를 잊는 과정을 통해 만물과 합일하는 상태, 즉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다. 단색화에 나타나는 ‘숨구멍’이나 절제된 색채는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과 호흡하려는 한국적 현대미술의 독특한 지향점을 보여준다.


8. 현대미술의 사회적 존재 이유와 인식론적 치유


현대미술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하는 ‘왜’에 대한 답은 그것이 가진 비판적 거리감과 인식론적 전환의 힘에 있다. 현대 사회는 모든 존재를 효율성과 자본의 논리로 환원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는’ 현대미술 작품은 오히려 우리에게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제공한다. 장자가 말한 ‘쓸모없는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나그네를 쉬게 하듯, 예술은 도구적 합리성에 지친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현대미술은 관람객을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능동적인 ‘사유자’로 변화시킨다. 특히 니콜 코헨(Nicole Cohen)의 상호작용적 비디오 설치나 로버트 어윈(Robert Irwin)의 장소 특정적 예술(Site-specific art)은 관객이 작품 내부로 들어와 환경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허문다. 이는 장자의 ‘물아일체(物我一體)’가 현대적 매체를 통해 실천되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작품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세계와의 새로운 연결망을 발견하는 치유적 경험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현대미술의 ‘왜’는 다양성의 보존과 소수자적 가치의 옹호와도 연결된다. 다원주의 시대의 예술은 단일한 미적 기준을 강요하지 않으며, 페미니즘, 환경 문제, 이주민 담론 등 사회의 그늘진 곳에 빛을 비춘다. 이러한 예술적 실천은 사회 전체의 창의성과 포용성을 증진시키는 강력한 ‘용(用)’으로 작용한다. 결국 예술이 세상의 잣대에서 ‘무용’할수록, 그것은 인간의 존엄과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는 ‘대용(大用)’이 된다.


9. 유동적 존재: 양자파동아트


필자의 작품 ‘양자파동아트, 도시의 중첩’은 '고정된 실체로서의 도시'가 아닌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관계의 장'으로 도시를 재정의하였다.

현대 존재론, 특히 양자역학적 세계관에서 존재는 하나의 고정된 점이 아니라 확률적인 파동으로 존재합니다. 목탄을 비비고 누르며 만들어낸 중첩된 도시의 선들은, 도시를 완결된 건축물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진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드러낸다.

이는 "사물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으로서 일어난다"는 현대적 존재의 방식을 시각화이다.

즉, 그림 자체가 '그려진 대상'을 넘어 작가의 존재와 도시의 존재가 충돌하여 빚어낸 실존의 기록'이 된다.

현대 도시를 딱딱한 콘크리트, 건축 매스가 아닌, 양자적 파동처럼 얽혀 있는 유동적인 존재로 바라본다. 목탄의 물성을 통해 도시의 차가운 외형 속에 숨겨진 뜨거운 에너지와 중첩된 시간성을 복원해낸 현대적 숭고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김남효, 양자파동아트, 도시의 중첩, 2025


10. 존재의 근거를 묻는 예술의 미래


현대미술의 ‘왜(Why)’에 대한 탐구는 결국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숭고한 유희이다. 서양 미학이 구축한 제도적 틀은 예술을 일상으로부터 분리하여 고귀한 사유의 대상으로 만들었으며, 장자의 철학은 그 분리를 다시 삶의 근원적인 자유와 연결시켰다. 현대미술은 이제 미술관에 걸린 정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사회와 상호작용하고 인간의 인식을 전복시키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진화하고 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성을 위협하는 시대에, 현대미술의 존재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기계가 모방할 수 없는 예술의 ‘왜’는 바로 작가의 실존적 결단과 사회적 책임, 그리고 장자가 추구했던 절대 자유의 정신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뒤샹의 소변기를 보며 고정관념의 파괴를 배우고, 아이웨이웨이의 부서진 도자기를 통해 권력에 저항하는 용기를 얻으며, 박서보의 선 긋기를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는다.


예술은 당장 세상을 바꾸거나 질병을 고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왜’ 이러한 모습인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깨어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이 순수미술의 심미적 성취를 넘어, 동시대인의 정신적 동반자로서 가져야 할 가장 깊은 존재의 이유이다. 현대미술의 ‘무용’은 곧 인간 존재의 ‘큰 쓰임’이며, 우리는 그 예술적 놂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아와 조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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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디자인연구소, 김남효 교수, Ph. D.


'감정과 사유의 깊이를 시각 및 언어로 풀어내는 아티스트'로서, 뉴욕 Pratt Institute 디자인 석사, 연세대에서 '칼융의 심리학에 근거한 MBTI & 건축계획'논문으로 박사학위, 홍익대에서 '메를로 퐁티의 몸현상학, 칼융의 꿈, 장자 철학의 비교연구'로 동양화 석사 등을 받았고,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초빙교수, 숭실대 대학원 주임교수를 역임하였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우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문인화 최우수상, 중앙일보주최 중앙회화대전 서양화 동상을 수상했으며, 한국미술협회 초대작가, 서울시 및 인천시 미술작품 심의위원, 종로미술협회 교육위원장을 역임하였고, QWAF 양자파동예술가포럼 대표, 아트코리아방송 칼럼 'Cross Over Art', 브런치 칼럼 '내면의 양자파동, 예술로 피어나다' 를 연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