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글로벌 기업을 거쳐온 임원에게
대기업 출신 엘리트 오너 회장의 기대치는 늘 분명하다.
그리고 대부분, 높다.
“자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알아서, 제대로, 한 번 정리해 와 봐.”
이 한 문장에는 많은 것이 압축돼 있다.
결과 중심, 속도, 완성도.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은 자연스럽게 임원 개인에게 향한다.
문제는 그 기대가
아직 충분히 정예화되지 않은 조직이 아니라
곧장 임원 개인에게 전달된다는 점이다.
오너 보고 자료를
온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직원은 아직 없다.
이 회사에서 오랜 시간 버텨온 고참 부장급에게 한 번 맡겨본적도 있다.
결과물을 다시 뜯어고치느라
차라리 처음부터 직접 했을 때보다 시간이 더 들었다.
그는 성실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문제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준을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의 차이였다.
어디까지가 ‘충분한가’,
어디에서 질문이 나올 수 있는가,
무엇이 빠지면 안 되는가를
몸으로 겪어본 적이 있는지의 차이.
그래서 선택지는 늘 비슷하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맡기거나,
책임을 지고 직접 하거나.
중요한 경영 어젠다와 관련된 회장 보고 앞에서는
대부분은 결국 후자를 택하게 된다.
조직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모두 퇴근한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다.
이 장면이 낯설지는 않다.
다만 가끔은 서글프다.
조직을 키워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조직의 역량이 아직
오너의 기대를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이 많다는 이유로
내 역할을 의심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이것 또한 솔직한 마음이다.
중견기업 임원의 자리는 종종 그렇다.
오너의 눈높이를 대신 짊어지고,
조직의 미성숙을 홀로 완충하며,
성과와 리스크의 경계선에 혼자 서 있는 자리.
조직이 자라기 전까지,
그 공백을 개인의 노동과 시간으로 메우는 역할.
오늘도 그 경계선에서
보고서를 직접 쓰고, 직접 고치고, 직접 마무리한다.
오너의 기대와 조직의 현실 사이에서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야근으로, 나 홀로 메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