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버지의 ≪이 풍진 세상..≫

이제야 들려오는 아버지의 18번..

by 노고록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아버지가 부르던 유일한 노래다.

그런데 흥얼거림은 딱 여기까지다.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이 흥얼거림을 들을 때마다 나는 무슨 의미 인지 몰랐다. 나중에야 가요책을 보다가 희망가라는 노래 제목과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시대 유행한 대중가요의 고전이다. 원곡은 영국의 춤곡으로 개사를 해서 미국에서는 찬송가로, 일본에서는 진혼가로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자가 "이 풍진 세상을"이라는 제목으로 개사를 하고 일제강점기인 1921년 발표가 되었다. 제목은 희망가지만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대 우울한 신세를 한탄하면서 불렀던 일종의 민중가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듣는 방향에 따라선 단순한 비탄과 절망이 아닌 세속을 초월한 진짜 행복과 희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이 담긴 노래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지 해방 후 군사정권시절인 1970~1980년대에도 민중가요로 꾸준히 불렸다.


"이 풍진(風塵) 세상(世上)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希望)이 무엇이냐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렸으면 희망(希望)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춘몽(春夢) 중에 또다시 꿈같도다"

다운로드 (2).jpg


아버지의 이 풍진 세상..


아버지는 젊은 시절 만주에서 얼마동안 생활을 했다고 했다. 항상 하는 얘기가 "오줌을 누우면 그대로 고드름이 된다"라는 말로 춥고 어려웠던 만주생활을 얘기했다. 일제강점기 시대 무슨 뜻을 가지고, 무슨 연유로 만주까지 갔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유랑기와 한량기가 있는 분이라 그냥 세상 유람차 갔는 건지, 아니면 청운의 꿈을 품고 갔는지는 알아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젊은 시절 고향에서 아버지의 이력은 소박하지만 화려했다. 소학도 마치지 못한 한문서당 몇 년의 학력으로 마을에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한자와 붓글씨에도 아주 능했다. 그래서인지 마을에서 선출직인 구장, 리장, 면의원과 훈장을 엮임 했다.

20대에 구장, 30대 초반에는 마을 이장을 했다. 두 번의 임기 모두 4·3의 한복판이었다. 마을을 책임자로서 상상치도 못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고 한다. 가깝게는 아버지의 사촌형님이 행방 불명되었다가 시신으로 발견되는 참사를 겪기도 했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면의원을 하던 1960년에는 4.19라는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맞았다. 이때 지금의 수산저수지가 만들어졌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만드는 일을 극구 반대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일은 행정의 주도로 결정이 되었고, 아버지의 임기 내 진행되면서 그 일을 막지 못한 아버지의 책임이 되었다. 어머니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아버지는 마을에서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기를 마치는 날, 아버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을에서 사라졌다. 수소문 끝에 찾은 아버지는 산 넘어 서귀포에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타향생활은 시작이 되었다.

이제야 조금 알 수 있는 아버지의 희망가..

내 기억 속 아버지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인 태도였으나 쉽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소주를 좋아했기에, 한두 잔을 하면 술김에 몇 마디 말을 툭 던질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듯했으나, 내가 이 말을 해서 무엇하겠냐 하는 눈치다.


분노와 부조리, 슬픔과 괴로움, 부당함과 배신감을 보고 살아온 이 풍진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서 찾는 게 술잔이었다.


이제야 그날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한없이 작고, 쓸쓸했는지, 그러나 그 속에 왜 애증이 잔뜩 묻어있었는지를 조금은 알 듯하다.

내 나이 아버지가 이 노래를 들려주던 그 연배가 되어서다.


...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잊었으면 희망(希望)이 족할까

드러내지 못하지만,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희망이었을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팔불출이 되어 나타난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