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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Aug 10. 2024

권위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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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정기고사 시즌이 되면 교무부장과 평가 담당 교사가 바빠진다. 고사 관련 연수를 준비하고 시험 매뉴얼을 정비하는 일이 수능시험 대비하는 일 못지 않게 촘촘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이 학생과 학부모에게서 제기되는 민원에 대비하는 차원임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고사 관련 연수에서 만나는, 수십 페이지로 구성된 연수 피피티 슬라이드와 양면으로 복사된 수십 장짜리 매뉴얼 묶음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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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현장에 이런저런 수식어를 앞에 붙인 ‘매뉴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때는 대략 2010년대 중반 이후였던 것 같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매뉴얼을 보는 시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매뉴얼 만능주의가 자연스럽게 통용되었다. 업무 처리의 효율성이나 객관성, 공정성 측면에서 상당한 이점이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컸다.


매뉴얼 등장 이전에도 학교 현장에는 여러 가지 지침과 규정이 있어서 학교 내 교육과 행정 업무의 절차를 통제했다. 그런 각종 지침과 규정이 행사하는 구속력이 매뉴얼보다 낮았던 것 같진 않다. 그런데 매뉴얼이 등장하면서 전반적인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기존의 지침과 규정은 물론이고, 이들의 존재 근거가 되는 상위 법령이 학교 안팎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교육의 권위와 교육활동의 근거를 이들 규범 체계에서 찾는 교사들이 늘어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교 내 관행이나 문화가 교육와 행정의 틈 사이로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법을 포함한 명시적인 규범에 따른 교육은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학생과 학생, 학생과 교사가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황이나 국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규범 체계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눈에 보이는 규범 체계에서 교육적 권위와 교육활동의 근거를 찾는 일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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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우리나라 학교의 거의 유일하고 최종적인 목표가 ‘졸업’이라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 믿는다. 이마저도 그 유통 기한이 얼마 남은 것 같지 않다. 졸업 인증이라는 권위의 원천을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탈학교 학생들이 갈수록 늘고 있는 고등학교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 해마다 2만 명 안팎의 고교생이 다니던 학교를 자퇴한다.


학교와 교사가 교육적 권위와 교육활동의 근거를 명시적인 규범 체계에서 찾는 일의 한계는 무력함으로 나타난다. 학교와 교사의 무력감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학교는 더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육기관이 아니며,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학원 숙제를 하거나 자습으로 부족한 수면을 채우고, 그사이 다양한 부가 활동과 급식 서비스를 제공받는 소비자처럼 지낸다.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요구와 욕망을 눈감아 주거나 그것에 영합한다.


교실 청소, 당번제, 학급 회의 등에 나름의 교육적 의미를 부여하여 진정성을 갖고 실시하는 학교와 교사가 얼마나 될까. 나는 지금 극히 일부 학교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바람직한 의미의 공동체와 질서와 규율 교육을 학교교육활동에 체계적으로 반영하여 실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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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살렘학교 교장 베른하르트 부엡이 163쪽짜리의 조그만 책 《왜 엄하게 가르치지 않는가》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교육과 교육자의 권위이다. 원칙과 관용, 훈련과 사랑, 일관성과 배려 사이에서 길과 균형감을 잃었다는 부엡 교장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면서도 우리 시대 교육과 교육자가 과연 교육적 권위를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원칙과 관용, 훈련과 사랑, 일관성과 배려, 통제와 신뢰 사이에서 중용을 찾는 것은 우리가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관용, 사랑, 배려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엄하게 교육하다가 아이들의 마음이 닫힐까 봐 두려워하고, 훈련이 아이들의 마음에 부담이 될까 봐 염려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엄한 태도가 오히려 아이들을 강하게 만들고, 너무 배려해 주고 과잉보호하는 것이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35쪽)


그러나 탈권위와 탈진실을 지향하는 오늘날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모두가 권위의 주체이자 원천이 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한다. 한 사회가 합의한 것으로 전제하는, 그리하여 거의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삶의 목표와 기준이 되는 참된 권위가 설 자리가 갈수록 줄고 있다. 교사가 권위를 지니고 진실하고 진정성 있는 교육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게 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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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없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과거에는 정전(正典, canon)과 정전의 권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의 텍스트와 한 명의 교육자가 쉽게 권위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교육의 목표와 대상이 쉽게 자리매김될 수 있었으므로 교육적 권위나 진실을 둘러싼 시비나 다툼이 일어나기 힘들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에서, 누구와 무엇에게서 그런 원천을 찾을 수 있을까. 온갖 첨단 도구와 시스템의 도움 아래 극단과 편향과 혐오가 표준이 된 듯한 이 우울한 세상에서 우리가 교육이라고 일컫는 행위의 끝이 어떻게 귀결될지, 그 끝에서 어떤 인간들이 나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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