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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은 Nov 22. 2020

[도시를 걷는 여자들] 책리뷰

로런 엘킨

나는 혼자 집 밖에 나갈 자유를 갈망한다. 가고, 오고, 튀일리 정원 벤치에 앉고, 무엇보다도 뤽상부르에 가서 상점마다 장식된 진열창을 구경하고 교회와 박물관에 들어가고 저녁에는 오래된 거리를 배회하고 싶다.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게 그거다. 이런 자유가 없다면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

- 마리 바리키르체프(러시아 귀족여성, 1879년 일기)


19세기 상류층 여성들은  마차를 타거나 샤프롱(보호자)을 동반하고 공원 산책을 하는 정도만 허락되었다고 한다. 여성들은 혼자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명예가 깎일 위험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여자들에게 그런 억압과 불평등은 없다. 치안을 걱정할 수는 있지만 세상의 시선을 겁낼 필요는 없어졌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가봤던 도시들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가보지 못한 도시는 구글맵을 찾아보며 여행 욕구를 달래보았다. 

책을 읽다말고 밖으로 나가 걷고 싶은 충동이 몇번이나 들었다.

작가처럼 파리의 골목길을 누비다가 북적이는 한 카페에 앉아서 옆 테이블 사람들을 관찰하고, 사색에 빠지고, 수첩에  끄적이고 싶었다. 



로런 엘킨이 걸었던 도시들 - 뉴욕, 베네치아, 도쿄, 런던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이 장소들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언젠가 어떤 도시를 걷게 되었을 때 나만의 방식으로 그 도시를 읽어내리라는 기대감을 갖게된다. 


걷기에 리듬이 좋고 내 그림자가 보도 위에서 늘 나보다 조금 앞서가는 게 좋다. 아무 때나 내킬 때 걸음을 멈추고 건물에 기대어 수첩에 매모를 하거나 이메일을 읽거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게 좋다. 그럴 때면 세상이 멈추기 때문이다. 걷기는 역설적으로 정지를 가능하게 한다.

작가 로런 엘킨은 뉴욕의 교외에 살았다. 넓은 지역을 다니려면 자동차가 필수인 지역이었다. 걷기보다 자동차에 의존해야하는 삶에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나를 걷게 하라. 내 속도로 걷게 하라. 삶이 나를 따라, 내 주위에서 흐르는 것을 느끼게 하라. 극적인 일을 보여달라. 예상하지 못한 둥근 길모퉁이를 달라. 으스스한 교회와 아름다운 상점과 드러누울 수 있는 공원을 달라. 도시는 우리를 달뜨게 하고 계속 가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원하게 참여하게 한다. 도시는 삶 그 자체다.


진 리스,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 등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이들의 삶을 조명한다.  작가가 '유령'이라고 말했던 다른 작가들의 삶이 더욱 궁금해진다. 


나는 몽파르나스 거리를 리스와 함께 걸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걸었고 길가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5프랑으로 큼직한 잔에 담긴 커피와 그만큼 큰 스팀밀크 한 잔을 마시며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는 라 쿠폴에 앉아 있었다...
 리스의 여자들이 아페리티프 한잔, 한잔더, 또 한 잔 더, 괜찮은 남자가 저녁을 사겠다고 할 때까지 잔을 비우던 카페들이다.


작가는 파리의 골목길을 걸으며 리스의 주인공들을 떠올리면서 깊은 사색을 즐겼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없는 '거칠고 길들여 지지 않은'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리스가 되어보고자 했다. 


파리를 사랑했던 작가 로런 엘킨. 파리만큼이나 사랑했던  진 리스. 파리에서  문학 수업을 가르쳤던   로런 엘킨은 '한밤이여, 안녕'이란 진 리스의 작품을 가르쳤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도 사샤의 고통에 공감하고 스스로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녀의 수업을 들은 많은 학생들이 심리상담사를 찾아가 비탄에 빠지고 외로움을 호소하며 울고 갔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로런 엘킨은 이렇게 썼다. 


지금 헤어지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줄 마지막 사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절박해진다. 우리는 늘 벼랑 가장자리를 바라본다. 얼굴에 주름이 지고 머리가 하얗게 되기 전에도, 스무 살일 때는 삶이 얼마나 더 처참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애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할 사람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남자 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는 학생이 말했다. '그건 감사할 일이야.' 나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고 '벼랑 가장자리'에 서있는 기분이 들어도 시간을 견뎌보면 알게된다. 그 시절의 상실감이 인생에서 단 한번만 오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것들을 몇번 겪다보면 세상이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천천히 체득한다.


여자들에게 길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던 시절을 생각한다면,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나가 걷고 싶어진다. 단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이제는 그랬다간 당장 과태료를 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언젠간 코로나의 시간이 끝날거라 믿는다. 그러나 끝났다고 정말 끝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예상치못했던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고 있다. 

정답은 없다. 이제부터 만들어가야 한다. 

답을 찾는 동안 나는 대한민국 곳곳의 도시들을 탐험해보고 싶어졌다. 

엘킨 스타일로 도시를 읽어내고 그것들을 기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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