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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라지 Feb 11. 2020

빨래가 뭐라고

 단정하고 깨끗한 것 이면의 수고로움

노들서가 집필실에 자리를 얻어 3월 말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높은 천장의 트인 공간, 서가마다 출판사와 책방이 선별한 도서가 정갈히 놓인 곳이다. 널찍한 장방형 테이블에 빳빳하게 다린 리넨이 깔려 있고 그 위 초록색 갓 백열등이 세련된 분위기를 더한다. 백색 소음과 어우러진 재즈를 들으며 뭐라도 써 내리라는 결의를 품어 본다. 그런데 내 시선은 자꾸 리넨 테이블보에 가 있다. 어쩌면 저렇게 늘 깨끗할 수 있지? 세탁은 얼마나 자주 하지? 누가 빨지? 집안일을 잊고자 나와 있는 이 곳에서도 내 눈은 빨랫감을 찾는다.


여성 해방을 앞당긴 일등 공신으로 세탁기를 꼽는 이들이 있는 반면 오히려 여성의 가사 노동을 가중시켰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중노동이었던 빨래가 세탁기 등장 후 '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주부에게 영영 떠넘겨졌으니 세탁기가 해방시킨 건 '남성'이라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던 간에 세탁은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식구 수가 많을수록, 청결 욕구가 클수록 그 수고는 더 커진다. 그 집 사람들 추레하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식구들에게 은은한 세제 냄새 풍기는 옷을 입히려고 나는 세탁기를 돌린다. 하루 한번 혹은 그 이상.


기본은 쾌속 코스로 45분, 매일 갈아입는 옷과 샤워 후 나오는 젖은 수건이다.  여름과 겨울에는 1시간 반짜리 표준 코스로 시간을 늘린다. 여름에는 땀에 절은 티셔츠가 쌓이고 겨울에는 옷의 부피가 커져서 빨랫감이 많기 때문이다. 흰 옷 짙은 색 옷 나누어 빨지는 않지만 '기능성 스포츠웨어'에 유연제를 사용하지 말라는 말은 철석같이 지킨다. 내 사전에 손빨래란 없다. 앞으로 40년은 더 써야 할 손목을 아끼기 위해서다. 걸레는 모아서 고온 헹굼 추가 코스로 돌린다. 대신 세탁조 청소 세제를 사용해 찝찝함을 덜어낸다.


주기적으로 세탁할 것들도 있다. 집에서 쾌쾌한 냄새가 난다면 커튼이나 침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뭔지 모를 좋은 향이 나는 아늑한 집을 원한다면 디퓨져나 향수보다 환기와 빨래가 먼저다. 한 달에 두세 번은 베갯잇과 이불을 세탁한다. 오래된 베갯잇은 삶아도 체취가 지워지지 않으니 과감히 버리는 게 낫다. 커튼은 안 다는 게 상책이다. 세탁소 보내면 돈이 들고 내가 빨면 골병든다. 철 바뀔 때면 옷가지와 이불을 갈아야 하는데, 압축팩에 보관해둔 옷들을 꺼내 보면 때로 묵은 냄새가 난다. 그럼 다시 세탁기 행이다. 사계절이 없는 나라가 부럽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너무 열심히 세탁기를 돌렸더니 안에서든 밖에서든 빨래 생각이다. 옷을 고르는 기준은 취향이 아니라 물빨래 가능한지 여부바뀐 지 오래. 연말 모임에서 만난 친구의 화려한 스팽글 니트를 칭찬하다가도 "이런 옷은 어떻게 빨아?" 쓸데없이 덧붙인다. 지인과 밥을 먹다가도 그의 흰 셔츠에 붉은 국물이 튀길까 내가 더 걱정이다. 필실에 앉아 테이블 위에 리넨을 깔고 정돈해 주시는 분을 떠올린다. 작가 명패를 얹고 작업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분의 노고를 생각한다. 만으로는 부족하나마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며 잠시라도 빨래를 잊고자 한다.



노들서가 집필실. 모자이크는 누구?  ⓒ 미라지




* 『세 바퀴로 가는 과학 자전거』(2006), 강양구 지음, 뿌리와이파리,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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