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삶을 살고 싶은 건 너무나 당연한데 말이지.
벌써 남자친구와 3년때 사귀고 있다니. 이만큼 길게 누군가를 사귀어 본적도 없을 뿐더러, 나의 대학생활의 전반을 이 사람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소름끼친다. -남친이 소름끼칠 정도로 싫은 게 아니라, 막연히 여러 남자들과 만나며 캠퍼스 생활을 할거라 생각했는데, 지나온 내 대학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에서 소름이 끼쳤다.- 여하튼 남친과는 사랑의 감정보단, 앞으로 오랜시간을 함께 견딜 전우처럼 느껴진다.
고학년이 되어 취직과 국가고시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1,2학년 때처럼 마냥 즐거운 데이트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남자친구도 나와 다르지 않다. 걔는 더하지. 본과 2학년이니까 말이다. 이럴 때 연애를 하는게 사치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기로 하고, 이 시간을 견디기로 했다. 찬란한 30대를 위하여 20대 청춘은 버리는 거라고 피식대면서.
지금이야 남자친구에게 해주는 것도 없고, 심지어 나를 위해 꾸미는 시간도 귀찮게 느껴지지만 우리도 그럴듯한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예쁘게 꾸미고 공연이나 영화를 보러가는 그런 거. 아이러니한 건, 이런 그럴듯한 연애를 할 때보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현재의 연애방식이 남친에 대한 불만이 덜 생기더란 거다. -이 상태가 매우 행복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남친과의 관계에서 불만이 안 생긴다는 것일 뿐.- 내가 꾸미는 걸 싫어하느냐? 절대 아니다. 나는 예쁜 옷을 입고, 귀걸이를 하며 스스로를 꾸미는 게 즐겁다. 가끔 귀찮을 때는 있지만 예쁜 걸 보면 일단 설렌다. 그리고 그것들을 몸에 걸치는 날에는 대체로 하루종일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기분좋게 나가서 남자친구를 보면 불만이 생길까? 남자친구와 내가 데이트에 들이는 노력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예쁜 옷을 입고, 화장을 하기 위해 씻는 시간을 제외하고 한 시간 일찍 준비해야한다. 씼는다고 생각하면 머리 말리는 시간까지 두시간이 걸리겠군. 그에 반해 남자친구는 씻는 시간 30분이면 끝이다. 당연히 결과는 내가 훨씬 화사하고 예쁘다. 그런 상태에서 남자친구와 손잡고 걸으면,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같이 다니기 싫다. 나보다 적게 꾸미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무슨 색깔의 립을 바를까 고민했던 나와, 입술이 갈라지고 터져서 각질이 부각되는 남자친구는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내 앞머리가 얼굴에 달라붙는 사소한 것은 그렇게 신경쓰면서, 정작 청결을 의심하게 되는 본인의 피부 각질은 전혀 신경 안쓰는 이중성을 발견할 때면 화가 치밀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남자친구와의 관계 전반에서 빠지지 않는 자괴감이다. 단적으로 매우 예민하지만 중대한 문제인 그의 살.
남자친구는 고도비만이다. 처음 사귈 때는 통통한 수준의 그냥 비만이었지만 사귀고 1년이 지나자 마자 고도비만이 되었다. 남친에게 먹는 건 인생의 큰 행복이고, 외모에 대한 지적은 매우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꺼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스스로 조절하겠지 생각하고 1년 넘게 기다렸다. 그러고도 남자친구는 여전히 고도비만이었다. 도저히 참지 못하는 수준에 가서 내가 살을 빼달라 요구하고 나서부턴 다이어트를 하려는 노력 정도는 하는 것 같지만 아직 큰 변화는 없다. 다이어트가 남친에게 꽤 큰 스트레스인지, 나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왜 살이 많이 찌고 난 뒤에야 다이어트 하라는 얘기를 하냐고, 찌기 시작할 때 그 모습이 싫다는 얘기를 했으면 지금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꿍얼꿍얼...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여자친구가 있으면 적어도 정상체중이 되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게 정상 아니냐는 거다. 그런데 남자친구는 나의 상식을 뛰어넘어, 다이어트를 해달란 내 요청 뒤에도 이렇게 말하더라.
어이가 없어서! 친족인 엄마와 여동생조차 변호해주지 못했는데 나는 할 수 있겠냐? 내가 그토록 남자친구에게 바라던 것이, 남자친구에겐 나의 존재 자체가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다음 든 감정은 절망이었다. 이 친구에게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느끼게 할 유일한 방법은 내 존재의 부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살 안 빼면 헤어질거란 협박이라니. 왜 나로 하여금 이런 협박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지 미웠다. 이 갈등의 시작은 남자친구의 살인데, 꼭 내가 갈등의 유발자 같았다.
그리고 억울했다. 왜 이 모든 건 내 고민이지? 내 살도 아니고, 내 얼굴도 아닌데, 그리고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내가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말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며, 왜 내가 더 스트레스를 받고, 왜 나만 외모를 따지는 속물이 되고, 가장 근원적으로는 왜 나만 이런 불만을 가져야 하냔 말이다.
여자들은 외모평가를 받는데에 너무 익숙해져 있고, 주변인들의 무심한 외모평가에 상처받지 않기위한 방어기재로 꾸미고, 가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상향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부정적인 외모평가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반대로 여자들이 주체가 되어서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외모평가는 낯설고, 그래서 터부시하고, 그래서 얼굴을 보고 너무나 당연하게 드는 생각(뚱뚱하고, 눈이 작고, 코가 낮다)에 그럴수도 있지... 라고 넘긴다는 거다. 단적인 예로, 우리는 아무도 중년 남자 배우의 주름에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세월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그런데 중년 여자 배우의 주름에는 저 여자도 이젠 늙어서 주름이 생겼다느니, 제일 예쁠 시절은 지났다느니 하는 말을 한다. 아무도 남자 중년의 주름에 제일 잘생긴 시절이 지났다고 하진 않는데.
위의 말들을 종합하면, 외모가 준수하며, 몸이 좋은 남자만 바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말 나는 정말 단순하다. 내가 억울하지 않도록 외모에 기초적인 공만 들이길 바랄 뿐이다. 근육은 없더라고 정상체중인 남자, 피부에 여드름을 예방하기 위해 세안을 하루에 두 번씩은 하는 남자, 겨울에 얼굴 각질이 안 일어나도록 로션은 바르는 남자, 키스할 때 까끌한 입술 각질을 느끼지 않도록 립밤 정도는 바르고 나오는 남자. 공평하게 노력해서 나에게 억울함을 주지 않는 거.
남자친구와 대화와 라이프 스타일이 너무나 잘 맞더라도, 외모를 아예 안 볼 수는 없다. 나는 외모 지적하는 남자들을 혐오하지만, 연애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외모관리는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 관리가 일방에 너무 치우쳐있다는 게 문제랄까. 적어도 예쁘게 꾸미고 나간 날 내가 억울하지 않게만 해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