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의'다
"이 나이에 무슨 인턴이야?“
처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었을 때, 스스로도 낯설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33년이라는 긴 세월, 공직이라는 단단한 궤도 위를 한 치의 오차 없이 달려온 시간이었다.
마침내 찾아온 은퇴 뒤의 자유는 달콤한 휴식일 줄 알았으나, 막상 마주한 '정년 이후'라는 광활한 운동장은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를 거대한 숙제와도 같았다. 막막함이 안개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내 삶은 늘 배움의 연속이었다. 다만 과거에는 조직이 정해준 과녁을 향해 뛰었다면, 지금은 내가 설계한 경로를 스스로 걷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결심했다. 인생 2막의 명함에 '베테랑' 대신 '60대 인턴'이라는 세 글자를 새기기로.
생각의 노화에 저항하는 법
인턴은 본래 배우는 사람이다. 화려한 직함도, 두둑한 월급도 없지만 매일 새로운 것을 익히는 연습생의 마음가짐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내가 굳이 고단한 '배움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배우지 않으면 생각은 고인 물처럼 금세 썩기 마련이고, 어제의 경험에만 기대어 살면 오늘의 세상과 불통하게 된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몸의 노화보다 무서운 것은 생각의 노화다. 그래서 나는 "나 때는 말이야"라는 완고한 벽 뒤로 숨는 대신, "이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 시작은 사소했다. 스마트폰의 낯선 기능을 하나씩 깨치고, 내일을 위해 자격증 공부의 끈을 놓지 않았다. 때로는 생경한 용어 앞에서 멈칫하고 서툰 문장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들을 정제하여 글로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점을 찍듯 이어가던 어느 날,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꿰어지는 희열을 만났다. 어제보다 한 걸음 나아갔다는 그 짜릿한 감각. 비로소 내 삶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가장 따뜻한 예의, 공부
돌아보면 젊은 시절의 공부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날카로운 '무기'였다. 하지만 지금 내게 공부는 오롯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부드러운 '방패'이자 최소한의 예의다. 스스로를 방치하지 않고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공무원이라는 낡은 외투를 벗어 던지고, '인턴'으로서 나는 네 가지 삶의 원칙을 세웠다.
첫째, 서툰 나를 먼저 보듬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럴 때일수록 자책하기보다 도전하는 용기를 먼저 칭찬한다. 나를 일으키는 동력은 결국 스스로 건네는 격려다.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모든 배움의 출발점임을 잊지 않는다.
둘째,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은퇴 후의 삶은 자칫 '시간 때우기'의 늪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오늘 글 한 편 쓰기', 'AI 관련 서적 독파하기' 같은 손에 잡히는 목표를 세운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성취는 없다. 작은 성공들이 모여야 비로소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셋째, 실패하고 서툴러도 괜찮다는 유연함이다.
화면이 멈추고 문장이 꼬여도 괜찮다. 인턴은 원래 실수하며 배우는 존재니까.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놓으면 실패 또한 귀한 데이터가 된다. 그 서툰 발자국들이 겹쳐 결국 나만의 단단한 길이 만들어진다.
넷째, 내 삶의 주인으로서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다.
은퇴는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는 쉼표다. 남은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지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 실수를 유연하게 수용하되, 내 삶의 운전대만큼은 타인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아직 늦지 않았기에, 다시 책을 펼친다
내게 공부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엄숙한 약속이다. 이는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전시용 지식이 아니라, 내 내면을 지탱하는 단단한 정신적 근육이 되는 과정이다. 책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이 시간, 나는 비로소 내가 뜨겁게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오늘도 나는 책을 펼치고 눈부신 빈 화면을 마주한다. 누군가는 너무 늦은 시작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늦었기 때문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늦지 않았기에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60대 인턴의 하루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를 만나는 설레는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이 배움의 여정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기꺼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학교에서 영원한 인턴으로 남고 싶다. 느슨해진 마음의 거문고 줄을 다시 팽팽하게 조여 매는 ‘해현갱장(解弦更張)’의 자세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모든 동료의 후반전을 뜨겁게 응원한다. 이 글은 그 길을 걷는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따뜻한 격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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