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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각의 비망록 Aug 14. 2024

일람표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이문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2018

2.17.

 문과대 신입생 예비소집일에 유설아를 처음 보다. 길게 땋은 검은 머리, 새초롬한 눈. 학과는 모름. 옆사람이 말 걸 때 말고는 고개도 잘 안 돌린다. 내 시선은 하냥 그쪽만.


2. 20.

 기숙사 입소. 룸메이트 효성이와, 같은 과 종성, 은정이를 만났다. 동고동락할 것 같은 예감.


2. 24.

 사회학과 OT. 유설아는 없었다. 혹시 사정이 있어 못 온 건 아닐까? 하지만······, 한 친구가 엑스맨을 알아낸다고 단체 카톡을 뒤지기 시작. 유설아는 우리 과가 아니었다.


2. 28.

 기숙사 구관 쪽 내리막길에서 유설아와 닮은 사람을 보다. 긴가민가.


3. 2.

 새내기 시작.


3. 6.

 막내동생 생일. 전날 술 퍼먹고 집에 못 가다.


3. 14.

 화이트 데이. 사탕은 못 받았지만 알 바 아닌 날. 낭만파음악산책 강의에서 유설아 발견. 정정기간에 들어온 듯. 졸지에 학과까지 알아버렸다. 일어일문. 일어일문 18학번 유설아. 대박.


3. 21.

 염탐꾼 투입. 같이 강의 듣는 효성이를 설아 옆 자리에 앉혔다. 결과는,

- 걔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 있던데.


3. 22.

 만취가 답. 빠른 포기?


3. 28.

 숙취로 시원하게 자체휴강. 항상 강의에 나가는 효성이가 다녀와서 내 팀원을 알려 주었다.


3. 29.

 만취가 답. 무심한 하늘.


4. 2.

 늦은 만우절 행사. 광장에서 짜장면 먹다 유설아를 만나다. 심지어 인사도 했다. 하, 심장아. 동네방네 자랑. 기분 좋아서 전 수업 자체휴강.


4. 4.

 루빈스타인 연주,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가단조'. 대체 뭔 생각이었던 거지? 설아에게 냅다 다가가서 물어봤다.

- 클래식을 좋아하세요?

 하, 이러려고 사강을 읽었나. 얼어죽을 낭만파 음악.


4. 5.

 만취가 답. 이상한 객기가 돌다. 밑도 끝도 없이 직진해 보기로. 마침 다른 강의에 일문과 학생이 있던데, 어떻게 안 될까?


4. 10.

 일문과 녀석과 친해지기 성공. 이 친구, 유설아와 친했다. 천운일지도.


4. 18.

 시험 시작. 역시 먹거리 골목도 터지기 직전. 종성이를 꼬셔서 일문과 친구들 모임에 느지막이 함께 가다. 그리고! 유설아, 번호 교환 완료. 술의 힘이란, 나의 용기란! 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다니. 나의 이 최전성기 시카고 불스급 빌드업.


4. 19.

 어쩌다 보니 연락이 계속 이어지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물어보니 애인도 없단다. 효성이가 잘못 본 듯. 심지어 답장 속도가 무지 빠르다. 말투가 그리 친절한 건 아니지만. 친한 형들한테 물어보니 다들 그린라이트란다.


4. 26.

 시험 끝. 이튿날 설아와 처음으로 저녁을 먹기로 하다. '유머러스한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 패치 완료.


4. 27.

 심하게 유머러스했나? 느낌이 좀 떨떠름하다. 연락은 계속.


5. 3.

 설아와 기숙사까지 같이 올라가다. 편의점에서 1+1 옥수수 수염차를 사줬다. 아무리 감춰도 감출 수 없는 이 나의 다정함.


5. 10.

 술자리에 데리러 오라는 설아. 시 한 편을 달달 외워서 달려갔다. 강연호의 '비단길2.'


5. 12.

 주변의 은근한 독촉. 효성이와 은정이 말고는 다들 고백하라고 한다. 사실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잖아.


5. 26.

 축제날.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다. 설아에게 덜컥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설아의 질문이 화근이었다.

- 너 왜 나한테는 까칠하냐.

- ······좋아하나 보지.

 이튿날, 사과하는 나에게 설아는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5. 28.

 설아의 발표. 브람스 '교향곡 4번'. 발표는 또 왜 그렇게 예쁘게 잘 하는지. 그럼 뭐하냐, 반쯤 차였는데.


6. 1.

 내 마음은 모른 체 저녁 먹자는 설아. 파스타집은 너무 느낌이 세서, 쿨하게 분식집에 데려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 하지만 마음먹은 말은 해야지. 근데 도무지 각이 안 선다. 이 녀석,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친구같이 구는 거야. 결국 포기.


6. 2.

 온갖 이별 노래가 다 내 얘기 같다. 고백도 제대로 못 해보고 지질하게 노래방 가서 목이 터져라 부른 토이의 '뜨거운 안녕'. 왜 그렇게 불러대는지는 같이 간 아무도 모른다. 자존심 상하잖아.


6. 5.

 술 마시고 기숙사 돌아가다 설아를 만나다. 자연스레 같이 걸어갔다. 내가 사랑하는 풋내길, 나를 싫어하는 유설아.


6. 21.

 종강. 다음 주에는 일주일 동안 학과 농촌 체험활동에 간다. 그 전에 오랜만에 부모님도 뵙고 휴식. 농활 장소가 설아네 본가랑 가깝단다. 어쩌라는 건지. 설아네 학과는 농활을 안 가서 그때 집에 있댄다. 어쩌라는 거냐고!


6. 28.

 농활 마지막 밤. 막걸리로 시작해서 양주로 갔다가 깡소주로 끝을 보는 총력전.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문득 걸려온 전화. 설아였다.

- 어라? 바로 받네. 어디야?

 깜짝 놀라 나가  보니 진짜 눈앞에 설아가 있다. 뭔 놈의 농활이 이틀이나 연락이 안 되냐면서 쌀을 던져주고 갔다. 아니, 일부러 안 한 건데······, 게다가 다음 날 라면 먹고 뜰 텐데 웬  쌀이냐고.

- 그럼 씹어 먹어 술 깨게!

 어휴, 성깔은. 그래도 찾아온 게 놀라워서 산책할 겸 계곡이나 데려갔다. 물수제비 가르쳐 달라면서 나보고 계속 던지게 했다. 확 밀어버릴까 보다. 하지만 취중에도 숨길 수 없는 나의 다정함. 내친김에 별자리까지 몇 개 알려줬다.


7. 7.

 나의 스무번째 생일. 유치원 이후 최대 인원의 파티. 설아도 잠깐 놀러와 얼굴을 비추고 갔다. 사람들 많으면 왜 그렇게 청순한 척을 하는지, 짜증이 난달까. 농활에다 생일파티까지, 우리 과 친구들의 의심은 높아만 가고. 하, 차마 차였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이 씁쓸함을 어찌할꼬! 하지만 이렇게까지 친해진 것도 기적이다. 기적이다. 기적이다······. 젠장. 멋진 생일날.


7. 24.

 형의 기일. 동백섬에 다녀왔다. 형이 내가 등록금 형제 할인을 받는 걸 알면 무척 기뻐할 거다.


8. 1.

 어쩌다 보니 설아와 전화하면서 같이 영화를 보게 되다. '8월의 크리스마스.' 서로 집중하느라 한 마디도 안 하면서 전화는 왜 하자고 한 건지? 그래, 그 정도로 내가 편하다 이거지. 난 아직 아닌데.


8. 19.

 2학기 시작, 기숙사 재입소. 설아는 다음 주에 온다고 했다.


8. 20.

 할 것도 없다면서 올라와버린 설아. 만날 사람이 많단다. 그중에 나는 없겠지. 근데 밤마다 거의 매일 마주쳤다. 일정이야 뭐 연락하니까 대강은 공유하고 있다만, 이렇게까지 자주 마주칠 일은 없잖아.


8. 24.

 효성이까지 복귀. 간기능 강화 훈련 시작. 나란히 거나한데 같은 식당에 설아가 들어왔다. 맨날 공부만 하던 효성이가 의외의 붙임성을 과시한 날. 이후로 셋이 급격히 친해졌달까.


9. 3.

 2학기 개강. 동아리 가입. 설아도 바빠졌다. 각자 전공 강의가 많아서 볼 핑계가 적어졌다.


9. 13.

 동아리 행사를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가는 길에서 설아와 효성의 뒷모습을 보다. 다정하게 걷는 듯한 두 사람.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왜 나는 숨는 거지. 걸음을 멈추고 길섶의 동산에 앉아 하릴없이 담배를 피웠다. 들어가서 눈치를 줘도 모른 척하는 효성.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 이때까진.


9. 16.

 친구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저녁을 먹자는 설아. 하릴없이 한 번 더 먹었다. 이때부터 자주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10. 13.

 설아와 저녁 먹고 산책하다 기숙사 옆길로 새 버린 날. 길이 난 대로 가 보니 웬 텃밭이 나타났다. 뭔가 고즈넉해지는 기분. 헤치고 들어가 쭈그려 앉아 있는데 문득 이어폰을 꺼내는 설아. 아니, 자기가 수지인 줄 아나. 어이가 없었지만 가을 하늘은 모든 생각을 아름답게 바꿔준다. 설아의 선곡은 사랑하기 때문에유재하. 센스는 인정. 그러고 돌아가서 혼자 앨범 전곡 돌려들은 나도 진짜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10. 31.

10월의 마지막 날.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한 잔하는 날. 설아와 처음으로 단둘이 술을 마신 날.


11. 1.

 11월의 첫날. 새로운 달을 기념하며 술 한 잔하는 날. 사실 할 생각 없었는데 효성이가 불러냈다. 김치찌개집에서 고기 자르는데 갑자기 소개받을 생각 없냐고 물어봐서 심히 당황. 심지어 상대도 훌륭했다. 선뜻 승낙하지 못하는 내 폐부를 찌르는 질문.

- 너 설아 언제까지 좋아만 할 거냐?


11. 2.

 설아에게 소개팅 얘기를 하다. 냅다 얼굴 보고 얘기하재서 살짝 설렜는데 만나서 상대 사진을 보더니 내가 절대 마음 못 얻을 거라고, 최선 다해보라며 조롱. 하, 이렇게까지 친구해야 하나? 오기 돋아서 운동 시작.


11. 15.

 수능을 기념하며 설아와 한 잔하다. 소개팅 얘기를 다시 꺼냈다. 운동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며 핀잔. 짜증나서 효성이에게 주선 요청. 껄껄 웃으며 연락처를 넘겨줬다. 넌 또 왜 웃는 건데, 이 친구야.


11.20.

 대망의 소개팅 당일. 야심차게 청남방에 청바지로 무장했다. 아니다 다를까, 상대도 날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 근데 설아가 다 망쳐놨다. 하필 만나서 놀고 있는데 왜 전화를 여섯 통씩이나 거냐고. 오후 7시밖에 안 됐는데 혜화에서 길을 잃었단다. 왜 전화를 제때 안 받냐고 짜증에 짜증을. 급히 마무리하고 설아를 데리러 가던 273번 버스에서 문득 내 인생이 대체 어디로 흘러가는지 가늠이 안 되기 시작했다.


11. 21.

 뻔뻔하게 소개팅 결과를 묻는 설아.

- 거 봐, 그럼 이제 나랑 놀아.

 아니, 저기요. 계속 놀았는데 소득이 없잖아요.


11. 23.

 유럽행 티켓을 예약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국하기로.


11. 25.

 실수.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을 같이 먹던 일요일, 설아에게 묻고 말았다. 너 나 좋아하냐고······. 대답하지 않고 어물쩡거리는 설아를 두고 혼자 기숙사로 돌아와 버렸다.


11. 26.

 실수 연발. 다음 날, 우연히 마주친 설아를 모른 체하고 지나갔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11. 30.

 실수 트리플 악셀. 설아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12. 1.

 첫눈 오는 날, 오해는 풀렸다. 규명할 진상도 없었다. 난 죽 설아를 좋아했고, 설아는 사람을 깊이 알아가는 편인데 내가 너무 일찍 고백 아닌 고백을 해버려서 일단 친구로 곁에 있었으며, 나중에는 내가 자기에게 정을 뗐다고 여겨서 대답을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걸 대체 몇 달을 끈 거냐, 이 여자야.

 어쨌거나, 영원할 것 같은 우리의 겨울이 그렇게 축포를 올렸다.


12. 24.

 출국. 인천국제공항까지 배웅 나온 설아. 귀국 시에도 마중 나온다고 약속하며 날 보냈다.


12. 29.

 설아의 생일. 런던에서 설아에게 줄 신발을 샀다.



아득하게 빛이 났던 네 눈빛

윤건, 가을에 만나



2019

2. 1.

 귀국. 마중 나온 설아. 전날 설레서 잠을 설쳤단다. 난 비행기에서 계속 잤는데. 하여간 따라가기 힘든 사랑의 크기.


2. 22.

 일문과 신입생 OT. 설아가 홍보부장을 맡다. 마침 종성이네 집에 얹혀 살 때라, 설아를 놀래켜줄 겸 해산 자리에 놀러갔다. 얼굴 부었다고 도망가려는 걸 보며 킥킥대니 또 그걸로 토라지는 그녀. 아니 솔직히, 안 사귈 땐 더한 모습도 봤잖아요.


3. 4.

 개강.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호사를 누리다.


6. 1.

 학술동아리 회장이 된 설아. 내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라 제대로 응원해주지 못했다.


7. 7.

 연인으로 함께 맞는 첫 생일. 난생처음 선유도라는 곳을 가 봤다. 생일 일주일 전부터 선물과 케잌을 준비한 당최 따라갈 엄두가 안 나는 넓은 마음.


7. 24.

 형의 기일. 근래의 날 보면 형은 뭐라고 할까?


8. 17.

 우리 동네에 놀러온 설아. 버스정류장에서 내 어머니와 동생을 마주쳤다. 반강제로 연애사실 공개.


8. 31.

 개강 전 짧은 여행. 설아, 효성, 효성이의 애인과 강화도에 갔다. 효성이 군대 가기 전 마지막 만남.


9. 2.

 2학기 개강, 형을 기억하시는 교수님들을 따라 부전공으로 국문과를 선택하다. 설아는 부전공으로 영어교육과를 선택했다. 수업이 겹칠 일이 적어졌지만, 시간을 쪼개 함께 있었다.


10. 17.

 나의 첫 앨범이 세상에 나오다. 설아의 프로필 뮤직에 내가 등장했다.


11. 1.

 설아와 함께 가입한 천문동아리에서 천체관측 답사를 가다. 밤이 깊도록 설아와 별을 올려다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때 설아가 했던 얘기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 난 네가 나 없이 보낸 모든 시간까지도 사랑해. 그게 지금의 너를 만들었으니까.

 장 콕토가 그랬다지, "내 귀는 소라 껍질, 파도 소리를 그리워한다." 내 귀는 별밭, 설아의 목소리를 그리워한다.


12. 1.

 1주년을 기념하다. 설아를 여의도에 데려가서 나의 꿈을 좔좔 읊어댔다. 설아는 시종일관 웃으며 맞장구. 아니, 어떨 때 보면 그냥 나란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 같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12. 25.

 함께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계획이 무산되다. 이유인즉슨, 전날 대차게 싸웠기 때문에. 삐거덕대다 결국 아작나 버린 톱니바퀴. 회복할 수 있겠지? 있어야 할 텐데.


12. 29.

 설아의 생일날, 꽃을 사들고 설아의 본가로 내려가다. 한시가 아까워 쿨하게 심사임당 세 장 내고 서울에서 보령까지 원터치 송구. 기다렸다는 듯이 버선발로 마중 나오는 나의 연인. 사건은 해결됐다. 한 방에 택시 어플 VIP 등극은 덤. 근데 아무 혜택이 없네.



변해가는 나를 봐 주겠니

윤종신, 기댈게



2020

1. 1.

 한강공원에서 함께 해맞이를 보다. 각자 소원을 빌었다. 난 내 인생의 길이 정해지기를 빌었고, 설아는 내가 잘 되기를 빌었다고 했다. 또 한 번 차이나는 마음의 크기, 이 여자를 대체 어쩌면 좋지.


2. 1.

 COVID-19 창궐로 연애망 일대 마비. 혼선 속에 전국대학 총학생회 의장 선거 출마를 결심하다.


3. 12.

선거에 실패하고 제주도로 낙향하다. 설아에게 처음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설아는 온 힘을 다해 나의 거짓말을 이해했다. 사귈 때 영원하자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인 것 같다.


4. 3.

 음악에 사활을 걸기로 다짐하다. 설아와 조금씩 멀어졌다. 따로 있어도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던 그녀의 그림자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5. 7.

 마음의 여유가 없어 설아의 투정을 잘 받아주지 못하다. 오뉴월은 원래 아픈가 보다.


6. 8.

설아를 처음으로 울리다. 설아를 위해 쓴 노래도 더는 설아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7. 7.

 함께 맞는 두 번째 생일. 설아는 음악에 진심인 나를 위해 여행용 기타를 선물했다. 설아 덕분에 처음 가본 파주출판도시.


7. 24.

 형의 기일. 형에게 난 음악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마침 바람이 불었다. 역시 형은 풍운아다.


9. 1.

 휴학을 결심하다. 설아는 3학년 2학기에 돌입해 임용고시 준비를 서서히 시작했다.


12. 1.

 2주년을 기념하며 예술의 전당에 가다. 그 앞에서 서로를 향한 미움이 터져버린 우리는 연주회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결국 설아가 먼저 나가버렸다. 난 따라나가지 않았다. 내 연락을 받지 않는 설아.


12. 25.

 이번에는 꼭 함께 있자던 크리스마스, 우린 연락 한 통 주고받지 않았다.


12. 29.

 함께 맞는 설아의 두 번째 생일. 그러나, 설아는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다. 차라리 혼자인 게 덜 외롭지 싶은 내 연인의 생일날.



다 타버릴 것 같았던 우리

토이, 너의 바다에 머무네(With 김동률)



2021

1. 8.

 이번엔 설아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난 나중에 후회하지 말기 위해서라도 시간을 갖자고 했다. 설아는 내가 이기적이라고 하면서도 내 말에 따라주었다.


2. 28.

 설아에게 전화하다. 약 두 달여의 권태기가 끝나고, 다시 시작했다. 내가 져도 되니까, 잘 하고 싶었다.


 3. 6.

 나의 두 번째 앨범이 세상에 나오다. 각종 공연장에서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설아도 한 팔에 진홍색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고 찾아왔다.


 3. 21.  

 임용고시 걱정으로 힘들어하는 설아를 거의 위로하지 못하다. 설아 또한 잔고민 많은 나를 잘 받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2주에 한 번 꼴로 만났다. 상투적인 만남이었다.


4. 2.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일들이 꽤 많이 쌓이다. 알면서도 묻지 않았다. 난 녹음실에서 반지를 잃어버렸다.


 5. 5.

 휴일을 맞아 문득 설아의 동네에 놀러가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설아는 부스스한 채로 독서실에서 나왔다. 손을 잡았지만 반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아가 아는 가장 맛있는 이태리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었다. 설아는 내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린  헤어졌다. 그날 설아는 두 번째로 울었다.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김광석,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후 설아는 한때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 강력한 타인이 되었다. 서로의 인생에 관여할 일 자체를 없앤 채로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 설아의 사랑이 붙인 가장 공허한 비늘은 그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몇 분 뒤면 당직사관이 돌아와 내게 순찰 지시를 내릴 이곳에서 이런 글을 적고 있는 이유 또한, 비늘을 떼어내기 위한 하나의 시도에 지나지 않다.

 이러려고 설아가 날 사랑한 건 아닐 테지만, 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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