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리는 건 어떡하게요.
그녀는 걱정스레 물었다.
- 발 씻는 데 저기 있네요.
난 오른편 구석을 가리켰다. 조그만 꼭지와 호스가 놓인 개수대가 있었다. 별빛 씨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 언제 봤대. 근데 말려야 하잖아요.
- 그건, 뭐, 나중에.
- 에휴, 큰일났네. 알았어요.
나는 방금까지 서 있던 달빛 물감의 시야로 그녀를 인도했다. 반달은 어느덧 하늘의 바닥에 걸려 있었다. 달빛이 수평선에 걸쳐 사방으로 짙게 퍼졌다. 나는 양말을 벗어 신발에 욱여넣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렸다. 별빛 씨는 샌들을 벗어 그 옆에 가지런히 두고, 귀부인처럼 치마를 잡은 채 내 옆에 섰다. 우리 앞으로 달빛이 부서졌다. 그녀는 살금살금 젖은 모래로 다가가더니 파도에 발끝을 갖다대려다 말다 했다. 달빛을 받아 그녀의 콧대에 아름다운 그림자가 졌다. 나는 뒤에서 그녀의 양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그녀가 놀라 뒤돌며 눈을 흘겼다.
- 아이, 깜짝이야. 나 놀란단 말예요.
- 얼른 담가 봐요.
- 그쪽부터 해요.
- 하면 나도 할게요. 레이디 퍼스트.
- 하여간 남자들, 비겁하다니까.
나는 슬며시 그녀를 떠밀었다.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천천히 걸음을 떼며, 나를 잡고 끌어들였다. 이내 파도가 밀려들어 복사뼈를 적셨다. 그녀는 차갑다며 발을 굴렀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닷물이 개운하게 닿았다. 샛별이 희미하게 빛났다. 파도가 육지를 훑는 소리, 달빛이 먼발치에서 넘실거리는 소리와 그녀의 웃음이 겹쳐 꿈결처럼 출렁였다. 저 멀리 새벽 낚시로 분주한 배들이 깜빡거렸다. 불쑥 그녀가 나에게 물을 튀겼다. 물거품이 볼에 닿았다. 나는 첨벙거리며 그녀를 쫓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도망가더니 치마를 감아올리고 파도와 줄다리기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 파도랑 줄넘기하는 법 알아요?
- 뭐라구요?
- 파도랑 줄넘기!
- 그게 뭔데요.
- 보여줄게요, 근데 치마 그렇게 많이 올려도 괜찮나? 보이겠는데.
-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별빛 씨는 눈을 찌푸리며 웃고 있었다. 난 파도의 선에 나란히 서서 뛰었다. 발 바깥에 걸린 물보라가 튀어 허리춤을 적셨다. 티셔츠 등에 꽃다발처럼 물방울 자국이 났다. 나는 아차, 하며 뛰어나왔다. 그녀가 옆에서 깔깔대더니, 퐁당퐁당 걸어다녔다. 나는 손가락 끝을 물에 적시며 그녀에게 말했다.
- 웃었다 이거지.
그녀의 얼굴에 물을 튀겼다. 그녀가 손으로 볼을 가리고 뒷걸음치며 소리쳤다.
- 안돼! 나 치마, 치마 흰색이에요.
얼굴에 뿌리는데 뭔 소리인지. 나는 그녀 쪽으로 걸어가다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순간 신음을 토하는 나를 본 그녀가 잠방거리며 뛰어왔다.
- 괜찮아요?
난 대답하는 대신 슬며시 그녀를 해안가 한가운데로 들이밀었다. 그녀는 내 티셔츠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이내 무릎까지 수말(水沫)에 적셨다. 그녀의 발치에서 달빛이 소금처럼 깨어졌다. 우린 어렸다. 양껏 철든 척했지만, 바다의 푸른 순수에 하릴없이 무너졌다. 서로만을 믿고 가출한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한참을 해맑게 뛰노는 우리를 둘러싸고 달빛의 지휘에 몸을 맡긴 새벽 바다의 오케스트라가 진하게 울려 퍼졌다. 우린 오랫동안 바다에 머물렀다. 동트기 직전의 새까만 어둠이 찾아왔고, 별빛 씨는 내 팔을 끌어 밖으로 데려갔다. 우린 헉헉거리며 개수대로 가서 발을 씻고, 나는 그 옆의 마른 바위에 폭삭 주저앉았다. 그녀는 치마를 가지런히 펴고 그 옆에 앉았다.
김광진, 아는지
우린 서로를 흘깃거리다 눈을 마주치고는 멋쩍게 웃었다. 그녀는 머리를 풀고 다시 묶다가, 엉키는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윤을 내도 바닷가에선 어쩔 수 없이 푸석해진다며 머리칼 끝을 매만지던 설아가 떠올랐다. 참 시시콜콜한 기억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말했다.
- 새벽 바다 좋네요.
- 그죠. 잠이 다 깼어요.
- 저도요.
그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 버킷리스트 하나 채웠다.
- 뭔데요?
- 바닷가에서 이름 모르는 남자랑 미드나잇 스펙트럼 같이 보기.
- 미드나잇 스펙트럼이요?
- 붉은빛부터 검은빛이 무지개처럼 겹쳐 보이는, 석양이 지는 중간 시간의 색조를 말하는 거예요.
- 지금 새벽인데요.
- 아까 봤잖아요.
- 화학적이네요.
- 회화적이거든요. 제가 만든 말이에요. 구글에 검색하면 게임 사진밖에 안 나와요.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미드나잇 스펙트럼'. 5년 전 문과대학 공개특강이 끝나던 날, 가을을 기억하겠다는 심산으로 무작정 경춘선에 오른 적 있다. 설아와 양수철교에서 석양을 뒤로 사진 찍으며 우린 그 하늘을 어떻게 이름 지을까 고민했다. 설아는 연인의 온도라 했고, 나는 외등의 슬픔이라 했다. 이후 언젠가 설아는 그날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벽을 꾸몄다고 내게 보여주었다. 꼭 「접속」의 전도연 같았다. 이래도 외등의 슬픔이냐고 묻길래, 미안하다고, 연인의 시간이라 부르면 어떻겠냐고 답했다.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문득 별빛 씨에게 말했다.
- 외등의 슬픔은 어떤가요.
- 그것도 좋네요. 적적하니.
- 보고 있으면 슬퍼지니까.
- 같이 보면 되죠. 나란히 가로등 하나 더 세워서.
- 그랬었죠.
그녀는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나는 쓸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 나중에 운길산역도 같이 갈래요?
- 오, 정말요? 우리 또 보는 건가요?
- 뭐, 인연이 허락한다면 그렇겠죠.
- 지하철 옆자리에서 우연히 만나면 재밌겠네요.
난 알고 있다. 일종의 추억 덮어쓰기마저 내 어리석음인 것을. 또한, 알고 있다. 그녀가 설아의 빈자리를 온전히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새로운 사랑이란 이전의 사랑을 부수려 들어오지만 결국 저울의 양쪽이 될 뿐이다. 설아의 발자국은 내 가없는 사랑의 바다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난 스쳐가듯 말했다.
- 사진 찍을까요?
- 좋아요. 번호도 알려주세요.
별빛 씨를 만나고 좀처럼 보지 않았던 휴대폰을 꺼냈다. 효성이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바다를 찍고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도 내 휴대폰으로 같은 곳을, 조금 다르게 찍더니, 번호판을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 핸드백에서 「Hedwig's Theme」이 투박한 진동으로 들썩거렸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 『해리포터』 좋아한다더니, 정말이었군요.
- 좀 부끄러운데요. 벨소리 뭐에요? 옛날 전화기 소리는 아니죠?
- 「Tears in Heaven」이요. 언플러그드 버전으로.
- 좋죠.
- 멋져 보일 것 같아서 해놓고 귀찮아서 안 바꾸고 있어요. 친구들은 싫어해요, 질린다고.
- 생각보다 일상적인 이유네요. 컬러링도 있어요?
- 전화해 볼래요?
- 그래요.
그녀는 내게 전화를 걸고 스피커폰으로 두었다. 자우림의 「우리들의 실패」 가 나왔다. 우린 그 투박한 음질의 음악을 망연히 앉아 들었다.
자우림, 우리들의 실패
이내 사서함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전화 걸었다간 힘 빠지겠는데요.
- 뭐, 그런 셈이죠.
- 누굴 기다리나 보네요.
- 그런 거 없어요.
- 있을 것 같은데.
- 에이, 그렇게까지 감상적이진 않아요.
- 난 감상적이어서, 첫사랑한테 전화 걸었다가 이 곡 들으면 울 것 같은데.
- 헤어지고는 전화 안 해요. 내가 안 하면 그 사람도 안 할 거예요.
- 있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서로를 불신해요. 그러니 당신도, 하고 싶다면 해 봐요.
- 우린 서로를 기억하면서 잊고 있어요. 그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하지 않는 겁니다.
적당한 사랑의 개울가도 아니고, 가없는 바다였다니. 참 크게도 잡았구나. 그래, 개울로는 수평선까지의 해리(海里)를 알 리 만무하니까. 더 멀리, 크게 보라는 경험이다. 웃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별빛 씨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맑은 눈으로 웃음 지었다. 그 눈 속에 파도가 새벽녘 여름 밤바다가 새까맣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말했다.
- 고생했네요.
- 고마워요.
- 됐어요. 번호나 저장해요.
- 이름도 모르는데?
- 왜 안 물어봐요?
- 이름이 뭐가 중요해요.
그녀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이쯤에서 그녀의 체력이 다해 어색한 분위기가 돌까 봐 겁이 났다. 지나치게 감성적이 되어버린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가 살짝 일어나 별빛 씨와 눈을 맞추었을 때, 그 다정한 눈길에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이미 추억을 예고해버렸다. 그 추억의 현재를 걷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넌지시 아쉬워하고도 있었다. 난 조심스레 말했다.
- 안 피곤해요? 어디든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 어딜요?
- 아니, 자야죠. 그니까, 음......
당황하는 날 보며 그녀가 소리내 웃었다. 난 얼굴이 새빨개졌다.
- 아니, 오해하지 마요. 같은 방 안 쓰면 되잖아요.
- 오해 안 해요. 아까 하던 소원 얘기, 더 해도 돼요?
- 그래요, 일단 가면서.
난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그녀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나를 끌어당겼다. 애매한 자세에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주저앉았다. 그녀가 말했다.
- 들어야 갈 수 있어요.
- 그럽시다. 한 개가 아니었군요.
- 버킷리스트가 어떻게 한 개예요. 제대로 안 들었죠. 첫 번째 소원이 뭐랬죠?
- 음, 「미드나잇 인 파리」?
- 에라이.
- 장난이에요. 모르는 남자랑 바닷가에서 미드나잇 스펙트럼 같이 보기.
- 맞아요. 두 번째는, 그 남자랑 같이 모래사장에서 새벽 늦게까지 이야기 나누기.
- 알죠. 그래서 내가 열심이었거든요.
능청의 한도를 초과했지만, 내 몇 안 되는 독자들이여, 초새벽이다. 감성의 모든 숨구멍이 다 열린 시간대다. 별빛 씨는 우습다는 듯이 눈을 흘기며 말을 계속했다. 그 다정함이 아늑했다.
- 그럼 이뤘다 칠게요. 세 번째, 맞춰봐요.
- 수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 됐어요. 기대도 안 했어요.
- 강조하지만, 나 그렇게 감상적인 사람 아니에요.
- 그게 수위랑 무슨 상관이에요!
- 첫차 타고 돌아가서 각자 부모님께 문안인사 드리기. 이런 걸 생각했죠.
- 아……, 정말요? 저만 이상한 생각 했네요. 네, 제가 나쁘죠. 그럼 이만. 즐거웠어요.
그녀는 토라진 얼굴로 핸드백을 탁 잡고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가지 말라는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못 내키듯 과장된 몸짓으로 앉더니 말했다.
- 수위가 아니라 한 수 위였네요.
- 뭐래는 거예요. 얼른 세 번째 말해요.
- 궁금하긴 한가 보죠?
- 네, 못 견디겠네요.
- 좋아요 그럼. 제 세 번째 소원은, 밤을 같이 새운 그 이름 모를 남자랑 같이 일출을 보는 거예요. 어때요?
체력도 좋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답했다.
- 흥미롭네요. 장소는요?
- 음…… 그 사람이 이끄는 대로? 여기는 말고, 다른 곳에서요.
나는 지난 기억을 더듬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왔던 방향으로 강둑을 건너 동명항 방면의 중앙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해안선 발치에 영금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울리듯 한다고 지어진 이름이랬다. 내가 설아와 그곳을 찾았을 때는 한낮의 비취색 바다가 부채처럼 펼쳐져 있었다. 『광장』 의 사북자리는 분명 그와 같은 바다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넋을 잃고 한참을 멎어서 파도가 살아 있는 막막한 대양을 힘껏 그러안았다. 나는 설아에 대해서만은 제쳐놓고, 보고 들은 그대로를 그녀에게 일러주었다. 그녀는 좋다며 활짝 웃고는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 문을 닫았으면 어쩌죠?
- 걱정 마요. 특별한 전망대는 시간으로부터 방치되니까.
- 멋진 말이네요. 원래 그런 식으로 말하나 보죠?
- 빨리 가려고요. 설악대교로 갑시다.
- 택시 타나요?
- 그래야죠. 당신이 내요.
별빛 씨는 망설이는 듯 물보라가 덜 마른 치마폭을 어루만졌다. 나는 팔을 뻗어 그녀의 핸드백을 들고 일어났다. 팔뚝에 그녀의 옆구리가 스쳤다.
- 질문 끝났죠? 갈 거예요, 말 거예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수평선 끝자락부터 밤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우린 서걱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백사장을 나왔다. 그녀가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을 찍었다. 찰칵 소리를 듣고 돌아보더니 그녀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 같이 찍어요.
나는 타이머를 설정하고 휴대폰을 뒤집어 후면 카메라 렌즈를 가리켰다. 그녀가 킥 웃으며 날 보았다.
- 설마 셀카 몰라요?
- 이것도 그런대로 괜찮아요. 잘 봐요.
셋, 둘, 하나. 신호음이 울리고, 연사가 돌아갔다. 우린 사진을 확인했다. 어깨를 모으고 수줍게 미소지은 그녀 옆에 떨떠름하게 선 장승 같은 내가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돌고래를 닮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 사진만 보면 내가 자길 싫어하는 줄 알겠다며 웃었다. 우린 설악대교 북단으로 느릿느릿 길을 텄다. 택시는 단번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내해 대로변으로 이끌었다. 새벽녘의 바닷가가 어른거렸고, 드문드문 주차된 차 위에서 갈매기가 울었다. 움직인 것 치고 이상하리만치 정신이 맑았다. 바람이 사나운 겨울밤, 입김과 말소리로 자욱한 뮌헨의 카페에서 지친 몸을 옹그리고 글뤼바인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수련회에 가서 밤늦게 선생님 몰래 베란다에서 스키장을 바라보며 먹던 컵라면도 떠올랐다. 지친 몸, 입김, 컵라면에 글뤼바인. 참 객쩍은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다. 우린 휴무라고 써붙이고 내달리는 택시를 불러세워 사정을 설명했다. 일출이 얼마 안 남았다며, 택시는 텅 빈 대로를 야생마처럼 질주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피곤하지 않아요?
- 네, 저는 야행성이어서. 군인은 안 힘든가요?
- 참 내, 자존심이 있지.
군인이라는 말에 기사님께서 백미러로 나를 보더니 물었다.
- 군인이여? 휴가 나왔나 봬?
- 네. 그렇습니다.
옆에서 그녀가 끼어들어 말했다.
- 이 사람 탈영했대요. 어떡하죠?
웬걸, 그런 위험한 거짓말을. 나는 그녀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녀는 뭐, 하며 혀를 내밀었다. 기사님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여자친구 보러 나왔나 보네. 아가씨가 잘 해줘요. 안에 있음 외로워.
그녀가 능청을 부리며 대답했다.
- 이 사람이 잘해야죠. 저는 얼마나 잘하는데.
나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며 입속말로 말했다.
- 저 각개전투 만점이에요. 뭔지 알아요?
- 뭐라구? 간장게장?
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고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택시는 안개를 가르며 금강대교를 지났다. 왼편에 앉은 그녀 옆으로는 전신주가 드리운 시청 골목이 보였고, 오른편 차창 너머로 속초항과 장대한 동해 바다의 끝이 추억처럼 붉게 바래어갔다. 내가 지나가는지, 창밖이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삽시간에 사라지는 가로수들을 바라보자니 문득 효성이가 전화했던 것이 떠올랐다. 휴대폰을 보니 그에게 문자가 와 있어,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공기가 좁은 탓에 그의 목소리가 귓구멍 바깥으로 울렸다. 그녀가 놀라 돌아보았다. 나는 손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효성이가 말했다.
- 안 자냐?
- 일출 보러 가는 중. 왜.
- 아니, 나 저번에 넣었다던 공모전, 탔더라? 입선했어.
- 엥, 진짜? 축하한다. 살다가 네가 시로 상을 타는 걸 다 보네.
- 고맙다. 한 번 읽어볼래? 보내줄게.
- 그래.
나는 짐짓 밝게 축하하며 전화를 끊었다. 어수룩한 척 그 또한 나를 앞서가는구나……. 학창시절부터 선거도, 대회도 번번이 낭패를 겪는 나를 두고 어른들은 늘 괘념치 말고 소신대로 가라 했다. 가장 커다란 승리는 광야에서 거두는 법이라고. 물론 그런 적도 있었다. 앞으로도 똑같이 믿는다. 하지만 이력이 나열될 수 있는, 불안감이 덜한 삶이 조금은 부럽다. 그렇게도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욕심이겠지. 씁쓸하게 입가를 문질렀다. 진동이 울려 들여다보니 효성이가 메일을 보냈다. 첨부파일을 열었다. 세 편의 시가 투박한 손글씨로 원고지에 꾹꾹 눌러 적혀 있었다. 별빛 씨가 내 휴대폰을 흘긋거렸다. 나는 말했다.
- 친구가 시를 보냈어요. 문학상 탔다고.
- 오, 정말요? 저도 봐도 되려나?
- 우리끼린데, 뭐. 나중에 감상 전해 줄게요.
- 좋아요. 그럼 이따 저도 보여주세요.
- 네, 근데 얘 악필인데.
- 괜찮아요. 그림도 보는데, 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남우의 입선작을 확인했다. 「고요의 기지국」, 「엄마」, 그리고 「여름이라는 슬픔」이었다. 「고요의 기지국」은 불과 얼마 전까지 그와 메일로 습작들을 주고받을 때 읽어어본 산문시다. 한창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녀석이 갑자기 시 쓰는 데 맛들린 계기. 일필휘지, 언젠가 어머니의 병환을 듣고 화장실에 쭈그려서 단숨에 글을 썼댔다. 이후 공들여 다듬은 티가 역력했다.
손효성, 고요의 기지국
거칠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했고 골계와 정화가 있었다. 그러나 거북하기도 했다. 상처를 내색하는 모양새가 과해서 나보다 먼저 인정받게 된 걸까? 난 언제나 정제된 글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런 내가 실은 효성이보다 더 행복했던 걸까? 글쎄, 확실한 건 지금 그가 상을 탔고, 효성이 모르게 공모전에 제출한 난 떨어졌다는 것. 난 페이지를 넘겨 「엄마」를 읽었다.
손효성, 엄마
당최 은유적인 탓에 다양한 감상이 나올 것 같았지만, 멋있는 문장이었다. 별빛 씨에게 휴대폰을 건네며 느낌을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 이 한 줄이 다예요?
- 네, 엄마랑 아들 얘기 같은데. 어때요?
- 근데 어머니가 연잎이면 강이 아니라 바다여야 하지 않아요? 더 넓고, 더 깊으니까.
- 음, 그렇기도 한데……, 소금쟁이는 강에 사니까? 바다로 가면 죽잖아요.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처럼, 바다로 훌훌 떠났다가 다칠 때마다 몸을 녹인다는 뉘앙스로 쓴 것 같은데.
- 그럼 이렇게 되겠네요. 어른이 되어 바다라는 거친 세상으로 떠나는 내가, 영원한 안식처인 어머니께 쓰는 감사 인사인 거죠.
-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바다 때문에 강이 좁고 갇힌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것도 같고…….
-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요. 깊이 생각할 만하면 한 줄로 안 끝냈겠죠.
- 그런가요.
소금쟁이에게는 강물과 연잎이 가없는 바다보다 더 의미있는 세상이다. 효성이의 시도, 별빛 씨의 생각도 다 이채롭다고 느꼈다. 창밖이 한층 밝아진 가운데 표지판에 동명항이 눈에 띄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몸을 비틀며 내릴 준비를 했다. 나는 목적지에 가까운 것을 확인하며 마지막 시 「여름이라는 슬픔」을 훑어보았다. 대강 계절을 소재로 한 사랑시 같았다. 택시는 안개가 앞유리를 할퀴는 내리막을 지나 한적한 십자로에 들어섰다. 새벽 부두가 은은했고, 멀리 수평선 끝자락에서 산산하게 새털구름이 일어났다. 나는 바깥과 시를 번갈아 보다가 한 대목에서 문득 멎어버리고 말았다.
손효성, 여름이라는 슬픔
나의 글은 ‘우리 다시 만나게 될까, 초록이 드리우면’이었다. 설아의 사연 속 남자의 편지도 이와 같았다. 효성이의 시와 치밀할 정도로 유사했다.
간밤의 바다가 울부짖으며 파도를 토해낼 것처럼, 압도당할 듯한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내 많은 힘겨운 기억들이 얼키고설키기 시작했다. 급하게 발신함을 열어 목록을 뒤져보았다. 내가 효성이에게 시를 보낸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예 보여준 적도 없나? 들려준 적도? 머릿속에 먹구름이 들어찬 것처럼 시야가 희뿌얬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찡그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정말 단 한 번도 없었을까? 그와 마지막으로 대면했던 날이 언제였던가. 지난 일들이 마구 뒤얽혔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알림이 희미하게 들렸다. 별빛 씨가 카드를 내미는 모습도 어른거렸다. 하지만 내겐 다른 곳에 집중할 새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적요, 내 마음은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