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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아 Sep 23. 2022

내 차는 줄무늬

흑역사 운전으로 완성된 지킬 앤 하이드 스타일 

“다음 차는 좀 특이한 색을 살 거야.”

“지금은 무슨 색인데?”

“흰색. 아니, 흰 바탕에 회색 줄무늬. 약간 얼룩말 스타일?”

“그런 차도 있어?”

“그럼. 내가 시원하게 긁었거든.”


두 번에 걸쳐 완성된 무늬의 첫 시작은 운전을 시작한 지 약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자차 보험을 들 수 없었기에 내 차에 난 웬만한 상처는 그대로 두었지만, 웬만하지 않은 커다란 흔적을 지우기 위해 큰 비용을 들인 직후였다. 차와 통장이 깨지면서 멘탈도 함께 흔들렸기에 그 간 띄엄띄엄 쌓아온 운전 경험과 자신감은 싸그리 사라졌다. 차 수리가 완료되었다는 연락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은 달달달 떨려오기 시작했다. 브레이크와 엑셀의 위치도 헷갈렸다. 온 마음이 몸을 붙잡았지만, 일어나야 했다. 차를 집으로 가져와야 했고, 운전을 영영 안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비소로 가는 길에 나에게 끊임없이 속삭였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드디어 다시 앉은 운전석. 시동을 걸기 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경쾌한 엔진 소리와 달리 둔탁한 차의 뒤뚱거림을 본 사장님이 바로 내게 '초보'냐고 물으셨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나를 보더니 사장님은 직접 차를 빼주신 뒤 내가 스스로 도로에 합류할 때까지 길을 열어주셨다. 그때부터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발을 움직여 겨우 집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좌절의 한숨으로 바뀌는 건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차되어 있는 다른 차들을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득 찬 나머지 운전석 옆에 바짝 다가와 있는 기둥을 신경 쓰지 못했다. 사이드 미러에 비친 기둥과 차의 간격은 아슬아슬했다. 차를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좁은 틈 안에서 옴짝달싹 못할 뿐이었다. 그대로 차를 버려두고 집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기둥을 스치고 지나가버릴까 하다가도, 오래된 티를 벗겨내고 새 차처럼 단장한 모습과, 그 때문에 휘청거린 통장을 생각하며 조금 더 바둥거렸다. 애처로운 몸부림에 마침표를 찍은 건 둔탁하고도 선명한 소리였다. 아슬아슬하게 밀당을 하던 내 차와 기둥이 드디어 만난 소리. 차에서 내려 보니 하얀 바탕에 진행 회색빛 빗금이 그어져 있었다. 헤어 나올 수 없을 것만 같던 미로를 빠져나왔다는 기쁨에 잠시 희미했던 감정은, 주차를 마치고 물밀 듯 밀려왔다. 내 차!! 처음 잠깐 확인했을 때보다 빗금은 더 크고 선명해진 것만 같았다. 아빠의 말대로 아세톤을 사서 살살 닦아보았지만 크게 깨끗해지진 않았다. 더 세게 문지르면 아예 흰색이 벗겨질 수도 있단 말에 겁이 났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던 빗금이 사라질 때쯤 더 강력한 무늬가 생겼다.


군산에 가는 길이었다. 잘 들리지 않은 음성 때문에 과감하게 네비 어플을 갈아탄 뒤 첫 운전이기도 했다. 선명하고 또렷한 음성에 만족스러워하며 서울을 빠져나갈 쯤이었다. 갑자기 네비가 개인정보 동의를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이 미친...!! 동의를 요구할 거면 시작 전에 하든가!! 신호등 하나 없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두 손을 모두 운전에 집중에 해야 하는 초보였기에 네비의 요구를 무시하고 달렸다. 그랬더니 이번엔 네비가 멈춰버리는 게 아닌가! 


네비 없는 운전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정신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요구를 무시한 네비의 복수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앞을 보면서 눈동자를 최대한 핸드폰 쪽으로 돌리고, 왼손으로 핸들을 단단히 잡은 후, 오른손을 뻗어 핸드폰을 터치했다. 네비를 다시 켜기 위해. 그 순간 핸들이 파닥파닥 뛰기 시작했다.(적어도 내 느낌상으론 그랬다.) 그러더니 중앙 분리대 쪽으로 가는 게 아닌가! 으앙....!!! (주관적인 느낌상) 핸들과의 사투 끝에 차는 진정했고, 만신창이가 된 나는 눈에 보이는 출구를 찾아 도로를 빠져나갔다.


한가로운 공터에 세워두고 차를 살폈다. 이전에 새겨진 빗금을 아주 앙증맞게 만들어버릴 정도의 장엄한 줄무늬가 생겼다. 접힌 사이드 미러를 펼치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다시 운전석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괘씸한 네비를 꺼버리고 이전에 쓰던 네비를 다시 켰다.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조심스레 시동을 걸었다. 너덜너덜해져도 나아가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 


그리고 여전히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매끈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한, 지킬 앤 하이드와 함께하고 있다. 나의 흑역사를 담은, 나를 닮은 애증의 그 녀석이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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