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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울쥐 Apr 21. 2022

영혼이 털리는 날엔  경양식 돈가스를 먹는다.

인천 잉글랜드 왕돈가스, 제주 얌얌 돈가스


힘들면 돈가스를 먹는다.


이를테면 하루 종일 여기저기 불려 다닌 날,

사람들이 힘들게 한 날,

머리를 많이 쓴 날,

너무 힘들었던 일,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아 돈가스 먹으러 가야 해. 다른 것 말고

경양식으로.'


고기, 튀긴 거, 단 거

좋아하는 모든 것의 조합이다.

이 정도는 먹을 만했어 오늘.


사실 돈가스는 일식 돈가스도 맛있고

경양식 돈가스도 모두 맛있다.

그렇지만 정말 - 힘들 때는 '경양식 돈가스'

모닝빵, 수프 가릴 것 없이 텅 빈 마음을 채우듯

순서대로 다 때려 넣어야 한다.






경양식 돈가스 근본은 '부먹'이다.

찍먹과 부먹 사이. 탕수육엔 여러 논쟁이

분분하겠지만

경양식 돈가스는 무조건 부먹.


내가 좋아하는 인천 잉글랜드 돈가스는

완벽한 경양식 돈가스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촉촉하고 달큰,

뜨거운 소스를 덮은 두툼한 고기튀김.

레몬 슬라이스- 직접 만든 타르타르소스의

생선가스도 일품이지만,

역시나 간판에 적힌 대로 사장님 의견을 따른다.

왕 돈 가 스.


오이절임, 마카로니 마요네즈, 양배추 샐러드는

왕돈가스의 엄청난 궁합을 자랑하는 친구들이다.

수프와 샐러드, 음료는 셀프로 떠와야 하는데

이 자체로 이미 설레고 즐겁다.

들뜬 맘에 친구들 몫까지 솔선하여 퍼오게 된다.

행복한 심부름이 이런 걸까?

후에 다가올 행복을 위한 밑거름.

즐거운 발걸음이다.


돈가스를 주문할 때는 빵과 밥 중

선택하게 되어있다.

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선택인가.

맛있는 것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건 언제나 곤란하다.


가장 좋은 건 둘 이상 가서

한 명은 빵, 한 명은 밥을 주문한 후

나눠 먹는 방법이다.


밥도 빵도 포기 못하지.


일단 빵.

반짝거리는 모닝빵을 갈라 딸기잼을

끼얹어 먹고 남은 반은 수프와 함께 먹는다.

그래도 빵이 남았다면

돈가스 소스에 푹 찍어 먹기도 한다.

(으아아-)


밥은 말해 뭐해.

고소하고 달달한 쌀알에

돈가스 소스, 고기.

단백질에 쌀밥.

죽기 전 최후의 만찬을 고르자면

경양식 돈가스(와 치킨 중)를

고를 수도 있겠다 싶은 맘이다.



수프를 퍼 오고, 돈가스를 자르고

먹는 이런 성의 있는 먹는 일련의 먹는다는 행위.


때우듯 해결하는 끼니가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예의 넘치는 한 끼다.


먹을 준비를 모두 마친 후

막 나온 돈가스를 먹기 좋게 자를 때면,

대하기 어려웠던 직장동료, 환장하겠는 친구

등등 어려운 세상만사 모든 일들을 잠시 잊는다.


어쩌면 돈가스 자체보다 이 과정들을

더 좋아하기에 경양식 돈가스를

고집하는 거 같기도 하다.

일식 돈가스도 좋지만 진정 '털렸다 싶을 때'는

콕 집어 경양식 돈가스 집에 가니까.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한 하루,

돈가스를 먹는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나라도 나를 존중하자, 예의 있게 대해주자

뭐 이런 마음이랄까?






잉글랜드 돈가스가 과정의 미학이 있다면

제주 세화의 얌얌돈가스는 돈가스 장인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곳이다.

잉글랜드 왕돈가스와 달리 수프나 양배추 샐러드,

음료 등을 직접 퍼오지 않고 사장님이

모두 한 번에 내오신다.


과정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어려운

이곳의 강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한 그릇에 행복하게 설계된

모든 요소들의 총합.


한눈에 보이는 돈가스를 향한 사장님의 진심.

그것을 내 입에 넣는다는 만족감이라 할 수 있겠다.


돈가스를 주문하면

수저 놓는 종이를 주신다.

이 종이엔 돈가스에 대한 진솔한 애정이

담겨있다. 돈가스 소스나 돈가스 고기를

다루는 이의 진심이 묻어난다.

돈가스를 먹어보지 않아도

이미 맛이 보장되는 느낌이 든다.

이건 3n년째 음식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잡식가의 촉이다.


부엌에선 돈가스 고기를 돈육 망치로

펴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린다.

탕탕-소리에 기대감이 더욱 올라간다.

부엌에서 나는 소리로 돈가스를 만드는

진솔한 과정이 들리는 듯하다.

고기를 펴고, 튀김 가루를 묻혀

예열된 기름에 튀기는 모든 과정을

귀로 들으며 상상한다.


15분 정도 지났을까?

둥그렇고 커다란 하얀 접시에

낙낙한 감자튀김(진짜 넉넉),

상큼한 양배추 샐러드와 콘,

직접 만드신 과일 향 물씬나는

소스 옷을 입은

푸짐하고 영롱한 돈가스가 듬뿍!

무게감이 느껴지는 꽉 찬

접시가 다가온다.


과일 카레 같기도 한 것이

새콤 달큼한 향의 예쁜 소스가 눈에 들어온다.

한 그릇에 이렇게 완벽한 한 끼를 담아낼 수 있을까?

나이프를 손에 쥔다.


치즈 돈가스는

...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어서 세화 얌얌으로 가서

돈가스를 갈라보아야 한다.


노란 치즈가 예쁜 두툼한 돈가스에

나이프를 대면 그 사이로 하얀 치즈가 울컥하고

콸콸- 쏟아져 나온다.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정도의 자연치즈가

해일이라도 밀려온 듯  쏟아지는데..


이동진 평론가가 이 돈가스를 접한다면

'아름답다' 네 음절과 함께 별 다섯 개를 붙일 것이다

⭐️⭐️⭐️⭐️⭐️

(이동진 평론가님 팬입니다. 죄송합니다.)


감자와 돈가스, 약간의 밥까지

정말 포만감 넘치는 끼니다.

너무 아름다운 맛이었지만

몇 점을 남기는 수치를 범하고야 만다.


육지에서 배를 더 늘려서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


요즘도 많이 털렸다 싶은 날엔

경양식 돈가스 집으로 향한다.


내 돈 내 산으로

나를 존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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