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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디, 차이와 사이를 걷다
for Bleisure

5장. 여행 작가 시선으로 담은 출장 메모

by 정민영

5장. 여행 작가 시선으로 담은 출장 메모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노트북 한편에 저장해 둔 '출장 메모' 파일을 조용히 연다. 그곳에는 단순한 업무 기록이나 회의 요약이 아니라, 낯선 도시에서 경험한 소소한 풍경, 휘발될 듯 짧았던 감정의 파편, 우연히 마주친 현지인과의 대화 같은, 여행 작가다운 시선의 기록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보고서에 쓰지 못하는 이야기들, 성공과 실패의 이면, 자기 자신과 조용히 대면하는 시간―그것이야말로 출장의 진짜 흔적이자, 내 안에 남아 오래도록 의미를 빚는다.


일정표 너머의 순간들

출장 일정표는 늘 빈틈없음이 미덕이었다. 그러나 그 빽빽한 열 사이사이, 나는 빠짐없이 작은 공백을 남긴다. 회의와 미팅 사이 생기는 공복 30분, 태풍 때문에 갑자기 비워진 저녁 시간, 혹은 비행기 연착으로 생긴 새벽. 처음엔 그저 시간의 손실처럼 여겨졌던 그 틈들이, 어느 순간 내 인생의 귀한 한 페이지가 되곤 했다.

베이징의 한 새벽, 공항에 발이 묶여 소형 카페에서 따뜻한 우유와 딴죽만두를 시켜놓고, 출장을 준비하는 내 모습을 여행 작가처럼 천천히 써내려 간 적이 있다. ‘긴장과 설렘, 피로와 의욕이 뒤엉킨 새벽공기, 빛바랜 탁자 위에 비친 두 어른의 그림자, 그리고 유난히 따뜻했던 만두의 온기...’


감정의 기록, 실수와 깨달음

출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대부분 우연하거나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탄생한다. 상하이의 시장 골목에서 길을 잃고 두 시간쯤 헤맨 뒤, 뜻밖에 현지식당에서 마주친 꼬마의 쌍꺼풀 수북한 눈웃음. 광저우 야시장 한편, 내 서투른 중국어를 알아듣고 박장대소하던 식당 아주머니.
그 순간의 부끄러움이, 청년 시절 유럽 여행의 두려움과 묘하게 겹치며 ‘일하는 여행자이자, 여행하는 직장인’이라는 내 정체성을 더욱 깊이 새긴다.

실수의 기록은 그 자체로 성장의 씨앗이다. 예약을 잘못해 호텔 방이 없어 새벽까지 로비 소파를 베개 삼아 보낸 밤, 동료들에게 전하는 미안함과 스스로를 다독였던 그 순간의 감정까지, 나는 정직하게 메모에 남긴다. ‘모든 일정이 완벽할 순 없다. 실패도, 불편도, 나의 일부다.’ 그런 기록들이 시간이 지나자, 출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만의 용기를 만들어줬다.


풍경의 수집, 익숙한 낯섦에 손끝을 물들이다

출장지를 걷다 보면, 도시의 냄새, 소리, 색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베이징 자금성 벽을 따라 걷는 이른 아침의 싸늘한 공기, 상하이 푸동강의 저녁노을, 항저우 서호의 안개 낀 새벽.
회의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나 피로조차, 이런 풍경 앞에서는 이내 잦아든다.
나는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대신, 그날의 풍경을 메모장에 적는다. ‘파란 자전거와 하얀 스포츠화, 길가에 으스러진 노란 은행잎,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연인들, 까맣게 타는 꼬치구이 연기, 그리고 그 위로 퍼지는 라디오 방송국의 낮은 목소리…’

출장이란 결국, 남의 도시에서 나만의 낯선 순간을 수집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마다 내 마음이 어떻게 흔들렸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는 것. 여행 작가의 시선이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곱게 어루만지며, 결국 나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는 용기”에 있다.


일상의 디테일, 그 속의 진정한 중국

출장 중 만난 평범한 장면들―골목길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시장의 고양이, 버스기사의 라디오 소리, 택시 기사의 낮잠, 편의점 김밥 코너에 쌓인 간편식들.
그 작은 단서들이야말로 내가 만난 중국의 진짜 얼굴이다.
베이징 후통의 빗소리, 광저우 도매시장의 함성, 한낮 커피숍에서 혼자 공부하는 대학생의 표정, 지하도에서 들려오는 색소폰 소리.
그런 풍경을 기록할 때면, “나는 단순한 출장자가 아니라, 현장에서 삶의 온기를 채집하는 일상 탐험가다”라는 자긍심이 생긴다.


사람과의 만남, 인간적 서사

출장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거래처와의 공식 만남, 이름 없는 식당의 종업원, 시장에서 만난 노점 할머니, 같은 호텔 투숙객과의 짧은 대화.
상하이에서 택시 기사 아저씨가 “요즘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다”며 쑥스럽게 웃던 순간, 한밤 도로변에서 길을 안내해 준 경찰관의 다정함, 청두 찻집의 주인이 건넨 한 잔의 차와 “오늘은 만만디(천천히)로 가세요”라는 인사까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만난 따스함은 출장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는 최고의 약이다.

나는 매번 사람들과의 만남과 이별에 작은 기억의 조각을 남긴다. 호텔 방에서 그날 만난 사람의 표정과 말투, 나눈 농담 하나까지 그려둔다. 여행작가라면, 이 짧은 만남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인생의 선물로 여길 것이다.


중국 고전의 단상, 글쓰기의 영감

출장지에서 마주친 간판의 문구, 찻집 벽에 걸린 고사성어, 시장 간판 뒤에 숨은 시구를 기록하는 것도 나만의 취미가 됐다.
“물이 흐르는 것처럼, 인연도 흘러간다(流水无情,落花有意).”
저런 짧은 경구 하나가, 회의실에서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회의록보다 더 오래, 더 깊게 내 인생과 비즈니스에 남는다.

가끔은 출장의 성과보다도, 현지에서 마주한 한 문장의 힘, 한 장면의 은유가 내 삶을 바꾸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출장길에 일부러 고전 시집을 한 권 들고 다닌다.
번잡한 일정 틈틈, 멀어진 하루의 소음 사이, 노트 한 귀퉁이에 손글씨로 깨알같이 필사를 한다. 그 느릿한 시간에 내 생각과 감정이 깊어진다.


실패와 성장, 내면의 독백

모든 기록이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힘에 부쳐 집중이 흐트러진 회의, 뜻밖의 오해로 어긋난 협상 뒤처리, 밤늦게 호텔 방에서 홀로 흘린 눈물 한 방울, 낯선 병원에서 복용한 약 하나까지.
이런 솔직한 기록들이 진짜 출장의 무게를 알려준다.

“오늘의 나는 무거운 몸과 꺾인 어깨, 그러나 내일은 다시 충전되어 있을 거다.”
바로 그 순간, 내 안의 약함과 불안까지 직시하면서, 나는 한 걸음 더 단단해진다.
성장의 흔적은 메모장에 누적되고, 그 기록들은 어느새 새로운 직장인, 더 깊은 인간으로 나를 완성한다.

상상과 창의, 여행적 상상력으로 채운 출장

출장지의 낯선 풍경과 사건들은 언젠가 나의 스토리텔링 자산이 된다. 도시의 색, 계절의 온기, 날씨의 변화, 사람들의 말투와 속도.
이 모든 디테일에서 나는 새로운 기획안이나 협상 전략, 또는 인간관계의 은은한 실마리를 얻는다.

출장 메모장을 펼칠 때마다, “만일 내가 이 장면을 소설로 쓴다면?” “이 상황을 비즈니스 착안점으로 삼는다면?” 상상력을 확장해 본다.
통계자료 대신 골목길에서 얻은 감상평, 숫자 대신 진짜 체험으로 채워진 한 줄의 독백이 내 일을 살찌우는 영양분이 된다.


출장 메모, 내 삶의 자산

출장이 끝난 뒤에도 메모는 계속된다. 비행기 안에서, 공항버스에서,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그날의 풍경을 다시 떠올리며 기록한다.
회색 회의실에서 받은 무기력도, 길 위의 파란 신호등이 일깨운 희망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안도감까지 그 기록들은 나중에 다시 출장길에 오를 때, 새로운 시작점과 지지대가 되어준다.


마무리: 메모 그 이상의 메모

내가 출장에서 남기는 메모들은, 단순한 작업장이 아니다. 그건 매일 변하는 나와 도시, 그리고 세상과의 '사이'를 기억하는 일이다.
이 기록들을 통해 나는, 똑같은 출장 일상도 소설이 되고 시가 되며, 언젠가 또 다른 수필의 첫 문장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다음 중국 출장길을 준비하며 나는 다시 새 노트 한 권, 혹은 스마트폰 메모장을 꺼내든다.
출장의 본질은 결국 변화하는 내 삶을 기록하는, 작고 소중한 메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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