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high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방법
야근을 하고 오면 괜히 들뜨는 날이 있죠. 낮에는 외부 미팅을 만족스럽게 마치고, 오후 늦게 팀에서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밤에 회의내용 정리한 메일을 보내면서 뿌듯해하고, 귀가하는 길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두서없이 떠올라서... '아, 나 일 좀 잘하는데?' 또는 '아, 나는 이 회사/팀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날.
거기에 이름을 한 번 붙여봤어요.
야근, 특히 브레인스토밍 등 많은 두뇌활동을 필요로 하는 업무를 마치고 귀가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
일시적으로 지각능력, 언어능력, 운동능력 등이 활성화되며, 흥분 및 각성효과로 좋은 아이디어 *같은* 것이 쏟아져나온다는 생각이 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쳐서 잠을 이루지 못함
높은 확률로 다음날 아침 야그너's hangover 라는 증상을 수반함. 극심한 육체피로와 통증이 따르며, 어젯밤 떠오른 좋은 아이디어의 90%가 bullshit임을 인지하게 됨
네, 제가 내린 결론은... 이 현상은 runner's high 처럼, 일종의 high 상태에 가깝다는 거예요. 두뇌활동, 특히 (회의 등에서 활발해지는) 언어 활동이 두뇌의 보상 중추를 자극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추측이 들어요. 친구들끼리 수다 떨고 나면 느끼는 만족감 같은 거죠.
다음날 보면 어제의 아이디어가 별 쓸모가 없어요. 어제는 내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작은 만족을 주는 아이디어도 평소에 비해 훨씬 크게 받아들이거든요. 그것 자체가 보상이 되어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기도 했구요. 그러나 오늘의 나는 다시 현실에 맞게 기준을 훌쩍 올리고, 그에 다다르지 못한 생각들을 bullshit 이라고 쳐냅니다. 그리고는 '아, 나는 특별한 인간은 아닌가 봐' 하며 허무해지죠.
이 문장을 쓰는 지금은 새벽 2시네요. 저는 오늘도 야그너's high를 겪고 있습니다. 네. 문제는 이렇게 때때로 오시는 high를 막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생각을 잠재우고 자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생각이 돋아나서 잠을 이룰 수 없어요.
한때는 저만 좀 이상한가 생각도 했었는데요, 주변 분들 얘길 들어보니 이 토픽에 공감하는 분들도 많고, 저 자신도 이 일련의 흐름을 인지하고는 있으니(이 단계 다음엔 이 단계가 오겠구나 하는) 이제 그분을 영접하는 자세를 세워보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1. high가 오면 잠자기는 틀렸다. 억지로 눈감고 잠을 청하지 말자.
2. 메모 등으로 아웃풋을 늘려 보자. 최대한 많이 수집해 두자.
3. high가 올 때마다 실험하고 개선하자.
오늘밤 떠오른 아이디어의 90%가 bullshit이라도, 생각을 100개 정도 하면 내일아침에 90개 버리고 10개는 건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중 하나쯤은 보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밤은 이 글이 보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썼어요.)
이 글이 저처럼 야그너's high로 고생(?)하는 분께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