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포토는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해 준다. 5년 전의 나, 4년 전의 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날 저녁 회사 앞 가로등 사진에 시선이 머문다.
야근을 끝내고 나오던 길, 싸락눈 같은 첫눈이 가로등에 비쳐서 유난히 눈 부시게 느껴지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내년도 전략 보고서를 끝내서 속은 시원했지만 몸은 천근만근이다. 눈이 온다. 눈이 아프네. 진짜로 눈이 부셔서 예쁘게 보이는 건가. 달리는 고속도로 위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혼재되어 떠돌았고 그 끝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자책감이 돌연 밀려들어왔다.
얼마 안 가 나는 결국 휴가를 내고 밖으로 나왔다. 장소는 필리핀 남쪽 시골 마을 모알보알이었다. 엄마와 친구들은 또 나가냐며 질색했으나 연차가 남아서 라고 웃어넘겼다. 실상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번 아웃이 올 것 같았다. 한 해의 마지막을 차가운 눈을 맞기보단 강렬한 태양 아래 늘어지듯 쉬고 싶기도 했다.
성탄 주간 다이빙 샵은 문을 항상 열어두는데 필리핀 아이들이 캐롤송을 부르며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어떤 아이는 기타를 치고 어떤 아이는 산타 모자를 돌리고 어떤 아이는 노래를 불렀다. 로비에 있던 나는 종종걸음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 캔디를 두 주먹 가득 쥐어서 건네주었다.
ㅣ 감사합니다.
아이들은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며 한국어로 화답했다. 그러고선 금방 Thank you song을 불렀다.
개 중에는 낯이 익은 게 어제 다녀갔던 아이가 있는 것도 같았다. 동네 아이들의 익살맞은 얼굴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고작 캔디 몇 개를 준 것뿐인데 마치 내가 산타가 된 것 같았다.
비단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은 다이버들에게도 크리스마스 시즌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삼일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고 하늘만큼이나 깨끗한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얼마 안 가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배 한 척이 몸을 드러냈다. 오후 다이빙을 끝내고 샵으로 돌아오는 배였다.
배에 탄 다이버들이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 중에는 손을 크게 흔드는 빨간 산타도 있었다.
ㅣ 고마웠어요. 덕분에 진짜 기가 막힌 경험을 했어.
부직포로 된 산타옷을 벽에 걸며 아저씨가 말했다. 흥분된 목소리였다. 좋아 보여서 안도감이 들었다.
ㅣ 재밌었다니 다행이네요. 이 옷 정말 잘 산 것 같아요.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부직포 옷을 보면서 내가 대답했다. 옆에 있던 다른 분들도 돌려가며 잘 입었다며 너도 나도 나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정확히 그 시점부터 부직포로 된 산타옷은 내 인생 가장 잘 챙긴 여행 준비물이 됐다.
기실 어제저녁만 해도 살짝 소란스러운 멤버들이었다. 제각각 다른 곳에서 온 다이버들이 모인 로비에서 한 아저씨가 비트코인으로 대박이 터졌다고 말했다. 맥주를 전부 다 자기가 사겠다는 것도 모자라 새끼 통돼지 구이인 레촌을 사겠다고 얼마나 큰소리로 말했는지. 앞에 앉은 분이 자랑 치냐고 따지자 처음의 기세와 달리 분위기는 빠르게 침체돼갔다.
"뭘 해야 될지 몰라서 그냥 자격증 따러 여기 왔어요. 다이빙 재밌고 좋다길래."
아저씨가 풀 죽은 목소리로 자기 옹호를 했니만, 돈은 나도 많은데 그렇게 생색내는 것 아니라고 또 다시 핀잔을 들었다. 비트코인 아저씨 표정이 더 파리해졌다.
"사실 전 놀 줄 모른다..."
분위기는 좀체 나아지기 어려웠고 술자리는 이상하게 막을 내렸다.
노는 건 정말 별거 없는데. 오픈마켓에서 산 만원도 안 되는 부직포 산타옷이 그러했고 필리핀 아이들에게 캔디 두줌이 그러했듯이.
나는 다시 로비에 앉았다. 바로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데 물색이 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아서 가슴이 뛰었다.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바다를 보는 일, 보고서를 끝마쳤을 때와는 또 다른 충만함이었다. 사실 행복 또한 별거 없을지도 몰랐다.
요즘도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늘 그때가 생각난다. 햇빛 찬란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수면 위에 햇빛이 반짝이면 그 일렁임에 마음도 간질간질해지는 기분. 그 기분 때문에라도 구글 포토를 자주 열어볼 수밖에 없다.
구글포토로 수년 전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한 해 동안 수고했다고 크리스마스가 있는 게 아닐까. 삶에 있어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게 되는 것, 이게 크리스마스만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