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마주하게 된 '쓸모'에 관해서
쓸모
명사)
1. 쓸 만한 가치.
2. 쓰이게 될 분야나 부분.
뜯어보면 꽤나 씁쓸하고 차가운 말이지만 나는 요즘 자주 '쓸모'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이사를 앞두고 나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들을 그 것이 꼭 필요한 곳에 나누면서 생긴 일이다. 20대의 절반 이상을 넉넉하지 못하게 살아온 터라 무엇을 사는 것에 대해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버리는 것에 대해 나는 유독 어려움을 많이 느꼈다. 내가 버리지 못한 물건들은 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고 나는 그 것이 곧 쓸모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서울에서 살아온 4년이란 시간동안 집이 넓어지면서 또 결혼이란 이벤트를 거치며 크고 작은 것들이 사람 구실이라는 핑계를 위해 쌓여가기 시작했고 나는 물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쌓여가는 물건들을 보면서 한 때 지독하게 주머니가 가벼웠던 시절을 지나왔노라고 위안을 삼으며 살았던 것만 같다. 남편은 과거의 나를 잘 알기에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에는 유독 너그러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안은 온통 내가 쌓아둔 물건들 투성이였고 짐 정리를 시작하려고 둘러보니 문득 한숨이 나왔다.
몇 장만 쓰다 남은 공책은 나중에 아이디어를 담을 때 써야겠다며 한 쪽에 다시 미뤄두고, 선물 받은 핸드크림은 나중에 챙겨가야겠다며, 발색이 좋았는데 가방 구석에서 뒤늦게 찾은 립스틱은 다음에 발라야겠다며,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청첩장은 추억이 될 거라며 다시 쌓아두었지만 사실 그들은 아마 다음 정리정돈 때까지 까맣게 잊고 살게 될 물건들이었다. 코로나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요즘, 집을 둘러보며 다시 챙겨 내려갈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 구분의 잣대는 바로 나에게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였고 이 것은 나에게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책장을 한 가득 채운 책들은 가장 부피와 무게를 많이 차지하는 터라 독서노트에 필요한 구절들을 옮기고 부담되지 않는 가격을 매겨 내놓았다. 회사 생활을 하지 않으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스팀 다리미라던지, 집 안 가득 쌓여있는 일회용품과 아이스팩, 신지 않는 신발, 키가 너무 많이 자라 가지고 갈 수 없는 식물까지. 나는 나에게는 이제 쓸모가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값지게 쓰일 물건들을 정리될 때마다 하나씩 처분하기 시작했다. 중고 거래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물건을 하나씩 올릴 때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날아드는 메세지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기도 했지만 한 때 나의 온기가 묻어있던 물건들이 다시 쓸모를 찾게 되는 것만 같아서 기쁜 마음이 되곤 했다. 무료로 물건을 나눌 때도 빈 손으로 오시지 않고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 커피라던지 잘 익은 단감을 가져다주시는 아버님도 계셨고, '좋은 물건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라는 메세지를 남겨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나에게선 그저 쌓여있는 물건일 뿐이었을 것들이 누군가에게 의미있게 쓰이는 일은 요즘 우리가 자주 이야기하곤 하는 '에코 라이프'에 가까운 일이기에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루하루 조금씩 줄여가는 일상을 살고 있던 중 지난 밤에는 술에 취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일을 그만둔 이후로는 되도록이면 술을 마시지 않던 아빠였는데 췻기를 빌려 한 이야기인 즉슨 더 이상 본인의 '쓸모'를 찾을 수 없어 슬프다는 말씀이었다. 25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퇴근 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빠는 무료해진 일상을 어떻게든 다독거려 보고자 나무를 다듬어 작은 컵 받침이나 도마 같은 것들을 만들어 서울에 있는 나에게 보내왔지만 그 이후 베란다에 하나 둘 쌓인 나무 도마는 아빠의 무거워져가는 마음 같기도 했다. 나는 아직 잘 할 수 있는데 누구도 나를 찾아주지 않는 마음이 자꾸만 아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더 이상 쓸모 없는 물건들은 어떻게든 그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가는데 정작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쓸모를 찾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으니 마음이 문득 어려워졌다. 구조조정으로 어려워진 회사를 나온 뒤 쓸모를 잊어버리고 힘들어하는 아빠를 볼 때, 취업을 하려고 무던히 노력중이지만 실패하고 간신히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동생을 볼 때 그리고 길을 찾아가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아 그림과 글을 그리는 내 자신을 마주할 때는 더더욱 말이다. 그래도 나는 스스로의 쓸모를 위해 매일 노력해야한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 조금 더 노력하면 내일은 어디선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이따금은 의도치 않은 꾸준함이 우연처럼 내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이끌어주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내 손을 떠난 물건들의 '쓸모'를 바라보면서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쓸모' 있어지는 날이 오길 조금은 간절히 바랐다. 사람이 늙지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가 의미있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라는 걸 믿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