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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Nov 26. 2023

그리스도의 계시 6

6 th, 하늘 상급 5

하늘 상급


생명책에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 -1st

'하나님 보좌 앞 네 생물' 2021

[요한계시록 3장 4~6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현대인성경: "그러나 사데에는 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이기는 사람[신앙의 승리자]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인정]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죄 & 흰  옷

현대인 성경의 번역대로 흰 옷이 상징하는 것은 '죄악에 물들지 않았다는 인정'입니다. 


그 죄악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면, 일차적으로는 세상 나라의 여러 법률들이나 윤리법을 어기는 범죄나 각종 악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그 원죄를 다시 저지른다는 것도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은 이미 사망의 판결을 받은 죄인이고 그 판결 때문에 사람의 육체가 끝날까지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국법인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도 모든 백성들이 거슬러 범죄 했기 때문에 앗시리아, 바벨론, 로마에 의해 세 번이나 멸망당한 것도 '사람의 악한 본성에 의한 죄' 때문입니다.

지상 모든 나라의 법률 역시 온전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지 못하므로 건국과 멸망이 반복됩니다.

즉 인류 역사를 조망해 보면, '죄악에 물들지 않았다는 인정'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그 공의대로라면, 하나님의 영생구원에 이를 자는 아무도 없고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으므로 이미 노아의 홍수 때, 어쩌면 아담의 범죄 즉시로 세상은 소멸되었어야 합니다. 즉, 어떤 이가 도둑, 강도, 살인 또는 불효, 배신 등의 죄와 악행을 행하지 않았다며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도 설득력 없는 억지 변명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930년을 살았고, 대홍수 심판에서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으며,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진 대속제물 어린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증거를 확인했음에도 믿지 않고, 죄를 자각하므로 회개할 기회를 받았음에도 뿌리치는 완고한 고집입니다. 그런 고집이 정당하다고 포장하기 위해 온갖 화려한 철학과 사상과 윤리를 만들고, 그것들로 점철된 문화와 문명은 '거의 완벽하게 하나님의 빛을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즉, 그런 '인간이 만든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완전한 정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상태'를 일컬어 '죄악에 물들었다'라고 주께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옛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여행자가 그 성에 머물면 그가 가진 재물뿐 아니라, 여종 남종들까지 모두 탈취당하고 주인 된 자를 몸만 발가벗겨 살려 보내는 것이 공식 법률로 시행되었으며, 동성 간의 음행이나 모든 불륜이 합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법률이 정당화되었던 이유가 곧, 당시 사람의 지성과 이성을 지배하던 고대의 신화와 미신적 종교와 인본주의적 문화였습니다. 


그런 문화에 익숙해진 자의 본성에는 '옛 뱀이 심어둔 악', 곧 하나님의 공의는 고사하고 의로운 법이나 윤리 따위 역시 안중에도 없는 '거짓된 정의'가 마치 절대적인 선과 공의인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런 악이 보편화된 세상 속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원인 역시, '천지를 지으시고 죄인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이 곧 위선자이기 때문에 모든 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부끄럽지만, 주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과거의 필자 역시 그런 죄 가운데서 고통받았었습니다.


즉 바르게 말하자면, '완고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뿌리치며 허무한 사망으로 끝나버릴 인생'으로부터 거듭나서, 주님의 복음을 믿고 영접하므로 사망을 이긴 자가 받을 하늘 상급이 '어린양께서 주실 흰 옷'입니다.

또한 흰 옷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의로운 행위로 성실하게 살면서 주께서 열어두신 좁은 길을 간 성도가 결국에는 '사망의 허무를 극복했다는 그리스도의 인정'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인에게 주어질 하늘 상급이 '어린양께서 가지신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의 이름을 영원토록 지우지 않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언약'입니다.



사람의 악한 본성

사람의 악한 본성에 관해서 먼저 짚어보면,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한 모든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 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 때문에, 세상에 법이란 것이 존재하는 것이며, 그 법의 통제 아래 있는 모든 자는 '악한 본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유 없이 '오른뺨을 맞았을 때 왼 뺨도 돌려대는 자인지, 아니면  받아치는 자인지를' 조금만 생각해 봐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동안 딱 두 명의 그런 사람과의 교분이 있기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화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침묵하고, 싸워야 할 때는 피해를 감수하며, 보복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참기만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 이는 두 부류로 나뉘는데, '마음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지/없는지'에 따라 그들의 삶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마음의 화나 분노, 이기고자 하는 욕망, 보복하려는 의지를 표출할 방법을 몰라서 꾹꾹 누르고 차곡차곡 쌓아가는 이들입니다. 겉으로는 한 없이 선량하고 좋은 인품의 사람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마음을 볼 줄 아는 이의 눈에는 안타깝기만 하고 때론 답답하기까지 한 이들입니다. 


학생 시절, 어느 정신병원의 미술치료 클래스에서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는데, 그 기간 동안 만났던 여러 환자들이 그런 짓눌린 상태에 있다가 결국 한계점에 이르고 만 분들이었습니다. 

필자 역시 성장기를 그렇게 보냈는데, 환자들의 인생을 접하면서 많은 동질감을 느꼈었습니다. 당시에는 본인 역시 짓눌린 한계의 끝자락을 넘나드는 돌출행동을 보이면서 속에 있는 화를 풀어보려 하고 있었고, 그렇게 저질렀던 일탈행위들은 '미술학도이니까 그 예술적 성향 때문에 그럴 수 있지'라며 사람들에게 과도한 이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악한 본성의 표출'이었으므로 근본 화는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께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하나 둘 조금씩 가르쳐 주시면서 또한, 성장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정말 사람의 인내심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는 억울한 일들도 겪게 하셨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참된 인내를 온전하게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마주한 '그 일들에 대한 분노'는 싸워야 할 이유와 보복해야 할 명분도 서슴없이 주었으므로, 때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나들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수치였고, 민폐였으며, 악한 본성이 살아있다는 증명'이었습니다. 

즉,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계명이 조금 살아났어도, 주님의 선[goodness of God]으로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던 겁니다. 

엄밀하게 말해 필자가 내세웠던 '정의를 위한 명분'은, 내 속에 있는 악을 변호하지 못하는 구차한 핑계였고, 본인이 죄인임을 분명하게 증명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 앞에서는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이었던 겁니다.


그런 악한 본성을 마주하는 일들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은 없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걸으신 인내의 길을 묵상했고, 그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정말 미쳐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갈등했습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매일 10개 장[Chapters] 이상의 말씀을 읽으며 마음에 담으려 애썼지만, 깨닫는 것은 항상 부분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아는 만큼 행하며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흉내만이라도 내어보자 생각하면서 가정과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흉내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런 나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항상 내 옆에서 정죄하기를 멈추지 않았고, '가식적인 인간이다.' '종교 중독자다.' '무능하며 무책임하다.' '꿈만 꾸는 몽상가다.'라는 그 칼날 같은 지적들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서든 친구들 앞에서 만큼은 감추고 싶어 안달하는 내 위선을 감지하게 되면서, 그 때문에 고통받는 막막한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절망한 채 먼 곳으로  도망쳤고, 도망친 이유는 유치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나이 많은 어린애'와 같았습니다. 지금에서 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그 정죄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맞지만 적용이 틀린 즉, '부족한 죄인이지만 주께서 능력 주시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다.'라는 허울 좋은 긍정에 의지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길을 통과할 능력도 함께 주시지만,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자에게는 주님의 애절한 기다림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인정 곧,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는 주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죽기까지 인내하며 자신을 바꾸고 성장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내가 반드시 집중해야 했던 주님의 말씀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주님의 책망이었습니다.


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며 주의 계명을 지키고 인내의 열매를 맺는 자는' 화나 분노를 억지로 참거나 짓누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만의 정의감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거나 도용하면서 무분별하게 분노를 드러내고 육적 싸움을 싸우는 자가 아니며, 억울한 일에 대한 보복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악한 본성과 죄인 됨을 인정함으로 인해 '사는 동안 겪는 모든 고통을 영원한 형벌에서 감면받고 잠시잠깐 받는 형식적인 채벌' 정도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인내의 열매가 있는 자'입니다.

어린양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한 그분, 그리스도께서 뒤집어쓰신 그 죄와 악을 저지른 모든 아담의 후손 중 한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인정하면서 견디는 자의 인내는, 마음에 분노와 상처를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평으로 풀어버리는 '죄 사함 받은 자의 증거'를 인내의 삶에서 보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감당해야 할 사망형벌의 10분지 9를 주께서 감당하셨고, 그를 믿고 자기 죄를 자복하는 자는 잠깐의 인생 가운데서 기쁘게 자기 십자가를 지며 살다가, '사망 판결에 종속됨이 없는 육체의 죽음'을 또한 기쁘게 맞이함으로 나머지 10분지 1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여기서 잠깐 논지와 관련은 있지만 논외의 이슈 하나를 언급하면, 주께 받은 물질 축복의 10분지 1을 드리는 십일조 헌금의 의미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자임을 스스로 확증하는 표'이고, 성도가 그리스도께 보일 수 있는 작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십일조를 받으시되 절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교회 운영 및 주님의 모든 사역에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은 오직 '그리스도께 참 기쁨과 감사로 드려지는 성도의 자발적인 헌신과 참여에 의해서만 충족됩니다.' 

교회의 강요로 탈취되거나 또는 다른 이의 훌륭해 보이는 헌신에 자극받아서 '하나님이 아닌 교회 건물에 쌓이는 돈이나 헌신'은 주께서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즉, '진실한 감사와 기쁨이 없는 모든 종교적 행위'로 드려진 것들은 '교회를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드는 악'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베드로의 판단'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런 돈과 권력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했고, 지금의 개신교회 역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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