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th, 하늘 상급 9
[요한계시록 3장 4~6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사람[신앙의 승리자]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인정]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모세의 범죄
이집트의 종으로 비참하게 살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을 하나님의 거룩한 종 모세가 그분의 인도하심 속에서 탈출시켰고, 여호와의 율법을 받아 그 백성에게 전했으며,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할 모든 규례들을 제정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왕으로 좌정하신 '제사장 국가 이스라엘'을 건국했습니다.
필자가 성경을 처음 읽을 때 '모세오경의 기록'이 신화이지 역사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로 읽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해내고 나라를 건국한 거인, 모세는 분명 대 홍수 이전의 에녹처럼 죽지 않고 승천하지 않았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느보산에서 죽었다는 결말'을 보면서 많이 놀랐었습니다.
그런데,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사악한 이세벨을 정죄한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는 열왕국 시대의 엘리야가 불마차를 타고 승천하는 기록을 보면서는 '어? 이게 뭐지?' 하면서 '성경이 참 터무니없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참 신기한 것이, 같은 내용 같은 기록이라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전에는 오직 '죽음에 관해서'만 고민하던 내가, 점차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1~ 34절'
"모세가 주님께로 돌아가서 아뢰기를, '슬픕니다. 이 백성이 금으로 신상을 만듦으로써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주님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저의 이름을 지워주옵소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모세는 더욱, 자기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까지 내려놓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해주십사 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진짜 의인을 죽게 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저런 오해도 했었지만, 그보다는 대체 왜 그를 광야에서 죽게 하셨는지 무척이나 궁금했었고 아직도 정확하게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어서, 신명기 32장에서는 '므리바 반석에서 믿지도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도 않은 모세의 죄'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서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며, 120세에도 강건했던 육체의 죽음까지 초래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32장 49~52절'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 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그러나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해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을 패역한 자들이라 호통치며 인간적 분노를 나타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120년 인생동안 갈망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셨고 출애굽 1세대 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므리바에서의 무엇이 죄가 되었는지?' 납득하기 어렵기만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께서는 '주를 믿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주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은 것이 그의 죄'라고 하셨는데, 사실 바위를 깨트려 물을 내는 일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므로, 그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일이 아닌가?, 마치 분명 그렇다는 듯 생각이 되고, 그렇게 판단하지 않은 여호와는 어떤 신인지 의아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시는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의 이해로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민수기 20장 9~12절'
"모세가 그 명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취하니라."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아무리 고민해 봐도 '모세의 불신앙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죄는 또 모세의 어떤 행위에 초점을 맞추신 건지?' 명확한 것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여러 관련 글들을 읽었고 묵상도 많이 해서 대략적인 감은 잡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단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읽은 견해들 중에는,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임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꼬투리를 잡았다는 견해도 있었는데, 그러나 사람의 관점에서 죄라 할 수 있는 모세의 인간적인 실수, 과오, 범죄는 므리바 사건보다 더한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살인도 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터무니없다며 망설이기도 했고, 어린 여자를 취하기까지도 했습니다. 그 죄들이 부족해서 혹시, 하나님께서 모세의 큰 허물을 찾으려 했다면 그보다 더욱 더한, 모든 사람이 충분히 납득될만한 것들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견해 역시 인정이 안됩니다.
묵상
다만, 묵상과정에서 실마리를 잡은 것은 '모세가 받은 율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건국자이면서도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모세의 결말을 통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운명', 즉 '사망 판결을 담고 있는 율법과 육체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보도록 하신 의도는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모세의 죽음은 '오실 메시아께서 율법 아래에서 죽게 될 것의 예표'가 됩니다.
그 관점으로 다시, '믿지 않은 죄'와 '증거 하지 않은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우선, 모세는 '므리바의 견고한 반석과 같은 예수의 거룩한 신성, 그리고 반석에서 솟아난 생명수 되신 예수의 인성에 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이는, 메시아에 관해 간략히 언급한 '신명기 18장 15절' 기록에서 '메시아의 정체성과 그가 성취할 사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었음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
"여호와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세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를 좀 더 진전시켜 보면, 메시아에 대한 하나의 수식어가 될 '반석과 생명수에 관한 선지자적 지식', 다시 말해 '오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므로 그들의 생명과 거룩을 회복하실 것에 관한 지식'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을 지속적으로 쏟아내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날마다 불러일으키는 그들을 향한 모세의 인간적 분노는 손에 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치게 했고, 백성들을 향해 패역하다며 비난하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 '반석을 치는 행위로 드러낸 것이 그가 받은 선지자적 지식, 즉 그리스도의 상징인 반석과 샘물에 대한 계시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 믿음 없는 행동이 되었고,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하신 백성들을 향해 비난한 것'은 주님의 거룩을 손상시키는 범죄가 되었을 거라는 묵상입니다.
모세의 그런 행동을 범죄로 규정하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그는 아마, 40세 무렵에 그가 죽인 이집트 사람을 다시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때 참지 못했던 분노 때문에 이집트 왕자라는 높은 지위까지 잃어버리고 이후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하게 되었던, 그 기억입니다.
결과적으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한 출애굽 1세대 모든 백성은 그 40년의 기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죽었고, '거룩한 백성의 인도자로서 그들이 짓는 죄까지도 감당해야 했던 모세' 역시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죽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어 죽임 당하신 것과 닮은 것입니다.
이어서, '모세에게 있던 예언적 지식'이 쌓인 과정을 살펴보면, 출생 후 나일강에 버려지고 건져진 다음 40년 동안 '이집트 왕자들이 받는 높은 수준의 궁중교육'을 받았고, 이집트 사람을 죽인 후 40년 동안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후 40년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종 된 자가 행할 통치 훈련'을 받았는데, 또한 백성들로부터 따로 세워져 두 차례의 40일, 전체 80일 동안 하나님과 독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모든 비밀과 뜻과 계획'을 알게 된 분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남긴 유언과 예언을 보면,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조망하고 있으며, '신명기 18장 15절'에서와 같이 예수의 초림을 예고하는 언급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엘리야와 함께 모세가 주님을 만나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상의한 일에서도 그 지식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거룩하다 하신 백성의 생명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죽임 당할 것을' 모세는 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의 분노 때문에 메시아를 향한 믿음을 지키지 못한 것과, 거룩한 백성을 비난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 것이라고, 은혜 가운데 나름 묵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묵상이 하나님 앞에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죄 & 회개할 기회를 거절한 죄
그와 같이, 므리바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하셨는데, 그런데, 므리바에서의 일을 정죄는 하셨으나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운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셔서 그러셨을 거라 짐작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는 그리스도의 속죄함을 받지 않고서는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미리 본 것이 분명하지만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과의 직접 대면도 없었고, 앞으로 2천 년이나 지나서야 오실 것이므로 속죄받을 길은 아직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에 더해서 여호와께서는 '주께 죄지은 자를 생명책에서 지우겠다'는 선포까지 하셨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는, 그 상황에서 모세의 이름이 당연히 생명책에서 지워져야 하지만, 그럼에도 지운다는 언급이 없으셨고, 오히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그의 생명은 살아있다는 분명한 기록'까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언급과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세'가 그 증명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2장 31절 이하'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영원한 사망의 죄'와 '육체의 죽음이라는 단순 징계로 끝날 인생의 죄'를 구분하신다는 겁니다.
지상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형벌인 '육체의 죽음'은 창세 때에 이미 내려진 하나님의 판결이므로 부활의 그날이 이르기 전에는 사람의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지 영원한 사망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사흘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후손에게 유전되는 그 죄 때문에는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그 누구의 이름도 지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므리바에서의 모세가 지은 죄와 같은 죄를 지었다 거나 혹시, 그 보다 더한 세속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아담의 원죄처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그런 극단적인 범죄보다는 클 수 없으므로 주께서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 회개할 기회를 사람이 사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주시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죄는 회개할 기회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큰 은혜는 믿음을 가진 성도 역시 범죄 할 수 있으므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아무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그 기회를 뿌리치지 않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며,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시작되고 '열린 구원의 좁은 길'을 비로소 찾게 됩니다.
아담의 원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유전되고, 그 죄인이 일생동안 저지르는 모든 죄는 창세 때 정해진 사망의 운명에 따라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망으로 끝이 나지만, 그 형벌의 끝이 '이미 죄인이 된 자'를 다시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는 의인으로 거듭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첫째 부활에 참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영광의 날에 부활하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지 못한 것의 증거'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어도 거절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는 하나님의 권한에 있는 경우라서 사람이 언급할 수 있는 꺼리가 되지 못하며, '복음을 거절한 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말할 수 있는데, 즉 '생명책에서 지워진 이름'이며, 첫째 부활에 참예하지 못하고 그 뒤에 있을 '둘째 부활' 곧,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질 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멸시한 죄'이며, '그리스도께서 열어두신 십자가를 지는 좁은 길을 가지 않은 죄'입니다. 그는 교회에서 성도 간의 교제에 불성실한 자이며, 세상살이에서 하나님께서 도우라고 보내신 어려운 자들을 외면했거나 멸시한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로 분리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자와 같은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낮의 해와 메마른 땅의 비처럼 풍성하게 부어지며, 그 복은 이 땅에서 죄인 된 자가 받는 큰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주시는 회개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회개할 기회를 뿌리치는 완고한 고집을 끝까지 부리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죄는 회개하지 않는 이상 결국은 영원한 사망의 심판으로 인도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름을 주께서 생명책에서 지우실 때에, 주께서 기뻐하신다거나 그래서 진노가 가라앉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주께서는 그 지우시는 손길에 눈물을 쏟으시고 아픈 가슴 때문에 손을 떠십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련한 자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사망의 길을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그 가련함 때문에 흘리시는 주님의 그 눈물은 사람이 아닌 옛 뱀과 그의 자손들에게 쏟아지는,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죄'와 '회개하지 않는 죄' 이외에도 더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논점을 그에 맞춰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도 하고, 끝없는 슬픔에 빠지게도 하며, 또 사함이 없는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사람의 사랑과 죄'에 관해서 살피는 것입니다.
사랑 & 죄
그런데, 사실 그 세 가지 범죄 항목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죄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사람에게 주입하는 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 도둑, 강도, 사기, 상해, 살인 같은 것이고, 윤리적으로는 거짓말, 탐욕, 음행, 불효, 불충 등의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 사이에서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위법이나 범죄의 경우가 사람 인생에 있어서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주목해 보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오가는 깊은 사유'를 하게 되는데, 그때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조물주와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세속인 아니면 신앙인으로 구분되고, 신앙인이라면 신과의 관계가 잘 유지되는지 아니면 깨어져 있는지를 고찰하게 됩니다.
그런 사색들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죄의 유무이며 죄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죄에 대한 규정은, '인격적 관계 형성과 유지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인데, 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 둘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크고 작음으로 나눌 수 없고, 있는지/ 없는지로만 판단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크거나 작다는 것은 결국 변한다는 것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이 있다 한다면, 그 맺어진 관계는 영원하며 지극한 희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이 없다 한다면, 관계의 단절에 이어 다툼이 생기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하게 하며, 그 사랑 없는 판단은 '옳고 그름 둘 다를 죄로 규정'해 버리면서 영원한 심판을 초래하게 됩니다.
믿음에 관한 언급은 뒤로 미루고 사랑을 말해보자면, 먼저 헬라어에서 구분하는 개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헬라어에서 네 종류로 구분하는데, 아가페, 에로스, 스테르고, 필레오입니다.
아가페[agape]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 필레오[phileo] -친구 간의 우정, 스토르게[storge] -부모의 내리사랑, 에로스[eros] -이성 간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런 구분과 큰 연관성 없이 사용-기록되었습니다.
그 한 경우를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연달아 물어보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관련된 용어 해석이 있습니다. 그 용어분해는 '아가페와 필레오'를 서로 다른 뜻으로 구별하는데, 이는 다소 지나치다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첫째, 둘째 질문에서 사용된 단어가 '아가파오[ἀγαπάω]'로 동일하며, 세 번째 질문에서는 '필레오[φιλέω]'로 기록되었는데, 당시 아직 성화에 이르지 못했고 성령 세례도 받지 못한 상태인 그리스도의 제자 베드로가 그의 주 예수님을 단어 뜻 그대로 '아가페' 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라는 주님의 질문은, 단어 뜻만 생각하면 주님의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용어 분석을 하기 전에 먼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모국어 '히브리어'와 많이 사용되던 '아람어'에서 주님과 베드로가 사용한 단어를 살피는 것이 우선인데, 그런데, 4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사랑이란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짐작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지만, 확인할 길은 현재 없다는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대화가 이루어졌다면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 번역본을 토대로 또 다른 해석을 첨가하는 것은 그 근거가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사랑의 의미를 함축해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늘 영광과 하나님의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에 성경적 사랑의 모든 의미는 집약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곧,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형제, 이웃과 친구와 연인과 맺어진 사랑의 관계에는 절대적인 신뢰에 의한 헌신, 즉 '제 목숨을 버리더라도 상대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성경에 기록된 사랑의 종합적인 뜻입니다. 목숨도 버리는데 버리지 못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랑은 그 네 종류의 사랑 전부가 온전하게 하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아가페이며, 아무도 끼어들 수 없이 친밀한 에로스이며, 서로의 마음과 생각이 원활히 소통되는 필레오이며, 서로의 모든 것을 감싸고 품어내는 스테르고가 모두 하나 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쓴 '요한 1서'에 그런 사랑의 본질이 기록되어 있는 줄 압니다.
그런 사랑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유지되게 하며, 성도 간의 교제와 이웃 간의 나눔도 온전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는 그 이웃에게 구원의 통로가 되며,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는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회복시키는 복이 됩니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사람은 초월적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며, 친밀함에도 한계가 크고, 소통 또한 원활하지 못하며, 상대의 약점까지 다 품어내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주로 일방적인 사랑으로 먼저 사람에게 접근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슬퍼하시는 것' 또 '진노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령님의 양육과정에서 하나 둘 알아가게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무지한 백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신 하나의 이유입니다.
곧 '사랑에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왜 이렇게 가슴이 아파오는지, 죄송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죄에 대한 관점에 따라, 예수께서 지목하신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고,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거꾸로 돌려서 말했을 때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죄', 필시 '생명책에서 지워지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할 그 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본질을 가장 먼저, 완벽하게 보이신 분이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순종한 사랑의 실천은 '하늘 영광을 버리고 죄인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고, '율법의 주인인 분이 율법 아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신 그 헌신과 희생'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짓밟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 사건'이,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셨던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였고,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되었으며, 사람에게는 '영생구원의 길'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성취로, 믿는 모든 자가 걸어갈 구원의 좁은 길은 열렸고, 주께서는 사람이 먼저 주를 찾지 않더라도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그분의 복음을 전하시고, 또한 회개할 기회를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주십니다.
그러나 그 애절한 하나님의 은혜마저 거절하는 자의 죄는 지상의 모든 죄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