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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C Dec 07. 2023

그리스도의 계시 12

12th, 하늘 상급 11

하늘 상급


생명책에 기록되어 지워지지 않는 이름 -7th


[요한계시록 3장 4~6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죄악에 물들지 않은 사람]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사람[신앙의 승리자]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인정]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스도의 생명책 5


성경적 배경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축복의 언약은, '그의 자손이 큰 민족이 되고, 지상의 모든 민족이 그의 자손으로 인해서 복을 받아 아브라함의 이름을 알게 되고 창대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를 함축한 용어가 '복의 근원'이며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고 그가 '참된 복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동방의 땅 끝에 있는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전통관념으로 보면, 정화수를 떠 놓고 달에게 소원을 빌거나 정월 대보름달에게도 빌고, 큰 바위나 나무, 샘물가에서 비는 것은 자연의 일원인 사람이 어머니 같은 자연에 의지해서 '가족과 가문의 안녕을 위하는 염원'입니다. 

조상 제사는 '선조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는 것이며, 불상 앞에서 절하고 염불을 외우는 것은 선한 공덕을 쌓는 덕행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자연숭배와 종교적 의식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 잡귀신을 섬기며 칼 위에서 춤을 추는 무속신앙입니다. 그에는 오래되고 더러운 귀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악으로 규정하신 우상숭배를 '자연인 상태의 민중이 어떤 신적 존재에게 의지한다는 겸양적 관념'으로 보면, 그것이 '악'이라기보다는 '순박하고 힘없는 자연인의 일상'으로만 인식될 뿐입니다.


그래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그 일이 '뭐가 그렇게 큰 범죄인지?, 왜 죄가 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필자 역시 처음 읽을 때 '하나님께서 과하게 진노하신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금 송아지 신상은 단지 상징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먹고 마시고 뛰어 논 것은 사망의 땅 이집트에서 탈출한 것을 기뻐하며 감사를 표한 것일 텐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대의 우상숭배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몸을 숙이는 절로 예를 올리거나, 소원을 빌어 소박한 소망을 바라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친목을 도모하거나, 덕담을 나누면서 전통을 지키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문화에서, 그들이 절하며 섬기는 신들은 '타락한 천사들과 옛 뱀의 행적들을 기리는데서 만들어진 각 지방의 신들'이었습니다. 그 더러운 영들이 사람에게 가르친 '악한 숭배의식들을 지킴으로써 그들의 일상에서는 복을 받고 삶이 풍요로워진다고 믿었던 미신적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의지했고 지금도 남아있는 무속신앙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영들이 가르친 숭배의식은 '갓 태어난 아기나 어린 소녀를 달궈진 가마나 끓는 솥에 넣는 등의 각종 살해 방법들로 죽여서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인신 제사와 더불어 드려진 제물들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었고, 그들이 뛰어노는 것은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뒤섞여 저지르는 난잡한 음행들'이었습니다. 


최근까지도 아프리카나 남미의 밀림 지대에서는 인육을 먹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배 속의 아기를 사산시켜 보양식으로 먹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2000년대 초반이었던 걸로 기억되는데, 중국에서 자칭 예술가라고 하는 어떤 미친 인간이 사산한 아기를 삶아 보양식으로 먹는 영상을 온라인에 올리기도 했었습니다. 그와 같이, 현대에 이르러 발견되는 정교하게 구멍 뚫린 두개골, 어린 소녀가 밧줄에 묶여 항아리에 담긴 미이라 같은 고대인들의 유골들은 그런 악한 고대 풍습에서 저질러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정결한 신앙이 아닌, 인간이 만든 종교'는 결과적으로, '사람의 육체를 간음, 난교 등의 각종 음행으로 더럽히고, 고문, 살인, 학살, 식인 등의 잔혹행위들로 죽이려는 '악한 영의 순수한 악'입니다.

물론, 언급한 악한 종교의식들은 당시에 있었던 여러 지방과 나라들에 있었던 실제 경우들을 집약한 것이므로 시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 그러한 악습들을 모두 행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다를 바 없는 우상숭배, 제사의식, 축제를 통해, '거룩하게 지음 받은 육체를 더럽히고 해하는 각종 악행'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인간 악의 의지'였습니다.


그들이 섬긴 우상과 제사와 숭배의식은 이집트에서 행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집트에서 나오게 함에 있어서 먼저, 그곳에서 섬기던 10종의 숭배 대상들이 되려 이집트인을 해하는 재앙이 되게 하셨는데, 그들이 섬기는 신들이 단지 자연의 일부일뿐, 신이 아님을 그들로 알게 한 것이고, 그런 짓을 여호와께서 혐오하신다는 것을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미리 알리신 것입니다.

때문에 율법에서는, '여호와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그의 백성들도 거룩해야 함'을 자주 강조하신 것입니다.


피로 물들었던 나일강 신의 이름은 '크눔과 하피'이고, 온 땅을 뒤덮은 개구리 신은 '헤케트'이며, 티끌이 이로 변한 재앙의 대상은 대지의 신 '게브'이며, 파리의 신은 '바알제붑', 그리고 가축들이 죽은 재앙의 대상은 암소 '하토르'였는데, 그것들과 또 다른 모든 것들은 결코 신이 아님을 알리는 하나님의 선포였던 겁니다. 

그 10종 외에도 거짓 신들이 많으므로 굳이 모두 다 언급할 필요는 없다 싶고, 중요한 것은 '그 10종의 신들이 모든 잡신들의 집약된 표본'이란 것입니다. 즉, '주께서 지으신 온 세계에서 유일한 신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목축을 업으로 삼았던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서 금 송아지 신상을 만들었고,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상징이 아니라 이집트의 암소 '하토르'였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집트에서 객이 되어 괴롭힘을 당하다가 430년 후에 하나님께서 이집트를 벌하시고 큰 재물까지 얻게 해서 구출하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게도 하셨습니다. 또, 이삭의 아들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들에 더해서 요셉의 두 아들까지  자기의 아들로 삼아 그들 각자에게 축복하며 각 지파의 자손들에게 이루실 하나님의 뜻을 예언했습니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과 요셉에게서 나서 야곱의 두 아들이 된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모두 각기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고, 그 사명은 각 지파의 자손들에게 거룩한 유산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과 사명을 받은, 구별된 민족이 하나님이 없는 이방민족과 동일한 악을 행함으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과 축복들까지 잊으실 만큼의 큰 진노를 일으키셨던 겁니다. 

레위지파의 모세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을 걸고 신속하게 중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친형이자 대제사장으로 지목된 아론까지 포함된 이스라엘 전체를 쓸어버리셨을 것입니다. 

아마 모세 외에 간신히 살아남았을 법한 몇 사람을 추측해 보면, 모세의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 여호수아와 유다지파 갈렙이 생존기회를 얻었을 것 같고, 어쩌면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대로라면, 모세와 그의 두 아들을 제외한 전부는 시내산 앞에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기도 싫은 추측이지만 주께서 정말 그렇게 다 몰살하셨다면, 야곱의 12지파는 모세가 속한 '레위지파'만 남고 다 사라졌을 테고, 모세의 혈통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정말 그리 되었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각자들과 맺었던 언약들을 하나님께서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야곱이 자신의 열 두 아들들과 요셉의 두 아들에게 예언하고 축복했던 모든 것은 성취되지 못했을 텝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살아남은 몇 명을 다시 번성시켜야 했을 테고, 그들이 번성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세가 받은 율법을 다시 줘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텝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과 선포와 모든 기록된 말씀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방의 모든 민족들은 당연히 그것을 꼬투리로 삼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죽이기 위해 이집트에서 끌어내었다'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더욱 모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성모독은 모든 아담자손에게 씻을 수 없는 더한 죄가 되므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거의 모든 인류를 사망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고, 정말 손가락으로 헤아릴 만큼의 사람만 구원하실 수밖에 없게 됐을 겁니다. 

그 몇 사람을 살리려고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버리실 필요도 없게 되었을 테고, 구원받은 자들은 '메시아에 의한 구원'이 아닌,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지극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들만 승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은 마무리되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다행히, 모세가 가졌던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지 않았고, 아쉬우나마 하나님의 인내하심이 어떠한지를 이스라엘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33~ 34절'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제 너는 가서, 내가 너에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보아라. 나의 천사가 너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이후 시내산 앞에서 행한 이스라엘의 범죄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셨지만, 모세의 간청을 들은 주께서 돌이켜 다 죽이지는 않으셨고, 비교하자면 거의 형식적인 징계만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은 큰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면서, 잠시나마 참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교회와 필자 역시 잊지 말아야 할 주님의 선포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죄를 지으면,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을 나의 책에서 지운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죄지은 자가 벌을 받는다'는 극히 당연한 말이라 쉽게 넘겨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더 보면, '죄인이 받을 판결이나 형벌은 아무도 대신 짊어질 수 없다'는 속뜻이 찾아집니다. 생명책에서 지우는 판결은 영원한 사망에 떨어질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는 그 당사자 만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보면, '죄인이 다른 죄인을 대신할 수 없지만, 아담의 원죄가 없는 의인은 죄인을 대신할 수 있다'는 추론도 하게 됩니다. 따라서, '모세가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 이름을 걸고 '이스라엘의 죄 사함을 간구한 도고가 왜 중보가 되지 못한 것인지' 이해가 됩니다. 


곧,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선 의인으로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육체의 죽음이라는 운명을 가진 그의 유한한 생명'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가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는 요청이, 사람에게는 그 보다 더 큰 의가 없는 거룩한 행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생떼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은, '여호와의 절박한 심정을 품은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인내하심 만으로 죄를 범한 이스라엘이 소멸될 위기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고, '그 구원을 위해서 범죄 한 이스라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이웃을 위한 '도고 기도'이며, 허물진 자의 기도라 해도 주께서는 사랑과 인내로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내포된 의미는, '그 구원받은 자들 중에서도 마지막 그날에 심판받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보면 정말 두렵기까지 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묵상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알지 못하거나 성령님의 가르치심이 없으면 도출될 수 없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이후로 그러한 진리를 알게 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이시다.'라는 그 불변의 진리와 함께 성경책을 유산으로 남겨 그 이유를 성도와 교회 각자가 살피게 하고 그래서, 복음의 지식을 가지도록 돕습니다.

그 지식은, 성자 예수님께서 왜 처녀의 몸에서 나셨는지, 그리고 그분은 어떻게 대속제물 어린양이 되어 모든 사람의 죄를 자신의 몸에 뒤집어 씌울 수 있었는지를, 그 이유를 찾아 가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독생자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며, 예언된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담의 원죄와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이, 그 분이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지막은 '대속제물 어린양이 되어 죽는 것'이었고, 그분을 제물로 삼아 죽이는 자는 '뱀의 자손'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죽어 무덤에 들어간 뒤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인해, 뱀의 자손이 여자의 자손에게 입힌 상처는 고작 '발꿈치를 무는 발악' 밖에 되지 못했고, 창세 때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백성들이 삶에서 받은 모든 고난과 죽음도 역시, '발꿈치를 물리는 것' 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린양께서 이스라엘 한 민족만의 속죄를 위하셨다면 바리새파를 비롯한 유대 권력이 로마 총독 빌라도를 그 제사에 끌어들이지 못했을 텝니다. 즉, 죄짐을 지신 어린양께서는 '지상의 모든 민족과 만백성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유대에서 뱀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방에서 뱀의 권력을 가진 자인 로마제국을 '그 마지막 단 한번의 제사'에 참여시킬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3일 만에 부활하신 어린양 예수께는 아담 이후 타락한 온 세상과 모든 아담 자손의 죄를 씻게 하실 권세를 취하셨고, 그 죄 사함의 기쁜 소식이 곧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나, 기억하라. 때가 되면, 내가 그들에게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다."

앞서 짧게 언급하긴 했지만, 이 말씀은, 이후로 3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다림 가운데 있는, '어린양 그리스도의 최종 심판의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시간이 사람에게는 장구한 세월이라서 큰 믿음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과 성취하신 일들 하나하나를 모두 이루심에 있어서 그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모든 하나님을 믿는 성도에게 주어진 복이며 은혜의 시간'입니다.


한 경우를 보면, '생명책에 기록될 이름이 다 채워지는 시간이란 것'입니다. 이를 다른 방향으로 보면, '하나님께 범죄 한 모든 자들이 회개할 시간이 연장되고, 기회가 더 많아지는 한정된 은혜의 기간'입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와 자비는 요나의 한 맺힌 마음을 만져주신 말씀에서 찾을 수 있고, 그 기록된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알게 하십니다.


'요나 4장 10, 11절',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현재 이라크 티그리스 강변에 있었던 니느웨는 고대제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으며, 그 제국이 정복한 국가에 대한 지배는 학살과 포로와 이주였습니다. 그들이 정복한 땅을 황폐화하면서 자행한 잔혹성은 후대에까지 회자되었고 이후, 바벨론에 이어 등장한 페르시아가 정복국에 대한 개방정책을 시행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을 유린했고, 만주에서 자행한 731부대의 생체실험과 난징 대학살에 견줄 잔혹성이 고대 앗시리아에도 있었던 겁니다.


요나는 BC 8세기,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는데, 당시는 북이스라엘과 앗시리아가 대립 중이었고, 당시 잦은 분쟁들 속에서 자행되는 앗시리아의 만행에 치를 떨고 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을 멸망에서 구원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앞으로 그 제국은 요나의 고향 북이스라엘까지 초토화시키고 멸망시킬 것이었습니다. 

한국이나 중국이 과거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기억하며 그 섬나라가 바다에 침몰되기를 바라는데, 그들 중의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불러 세우시고, '가서 일본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 섬나라가 침몰하지 않게 하라'라고 한다면, 아마 백이면 백 모두 요나처럼 도망쳐 버릴 겁니다.

돌아보면, 시내 광야에서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사하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사람의 관점에서 만큼은 우상숭배와는 비교도 안될 전범 국가 앗시리아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모르면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필자 역시 인간적 판단으로는 납득이 안됩니다. 그러나,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주께서 내게 가르치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니, 그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라고 말한다면,,,, 음~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하는 필자를 어떻게 보실지를 추측해 보면,,,, 아무래도 그런 말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은 모든 민족, 만백성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작은 거짓말을 하고 자책하는 이에게도 아버지이며, 이웃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은 자에게도 아버지이며, 사람을 죽인 자에게도 아버지이며, 더욱 극단적으로 말해서 마오쩌둥이나 스탈린,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이 뱀의 자식이 분명해 보이는 자들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자비를 동일하게 베푸십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필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내 생각은 어떻다고 명확한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 24~42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지 비유'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그리고 이루실 일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 그러자 주인은 '원수가 이런 짓을 했구나.' 하고 대답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우리가 가서 독보리[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하고 다시 묻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독보리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걱정된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그냥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먼저 독보리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모아 들이게 하겠다."


글자 수가 많다는 핑계로 다 옮겨 적지는 못했지만, 24절에서 42절까지 읽고 마음에 담아 묵상을 하다 보면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함을 짐작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 비유는, 출애굽기 32장, 모세와 여호와 하나님 간의 대화와 동일한 맥락을 가진다는 것도 알 수 있고, 더욱 창세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신 판결과도 같은 맥락임을 알게 됩니다.


정리하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자는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그 죄인들 가운데서 '셋의 신앙을 잇는 자와 가인의 권력을 가진 자의 대립이 있는 곳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인의 후손 곧, 뱀의 후손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만 상하게 할 뿐이며, 그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독보리와 밀을 함께 자라게 그냥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수 때 곧, '마시막 심판의 날'에는 그들과 함께 '독보리 곧,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범죄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추려내어 그들의 죄상을 밝히고 행한 대로 처벌하며 불로 태우시겠다는 엄중한 선포인 것입니다.


주께서 지정하신 '추수의 때'는 두 번 있을 것인데, 그 첫 번째 추수의 날에은 믿음 가운데 죽은 모든 성도가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추수의 날은, 영원한 불이 타오르는 지옥의 문이 열리는 날이며, 어린양의 최종 심판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죄인이 죽으면 곧바로 지옥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잘 못된 상식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연옥'은 그들이 짜 맞추기 식으로 만들어낸, 성경 어디에도 없는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로써 믿는 자든 아니 믿는 자든 꼭 주의해야 할 것은, 아무리 크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 해도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는 그에게도 똑같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믿고 회개한 자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 그 은혜를 감사와 기쁨으로 지키면서 더이상 죄를 추가하지 않으면, 죄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구원의 완성을 볼 것이며, 그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 때가 이르기 전에 죄인임을 자백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자에게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지고 영원히 형벌받게 될 것을 부활하신 어린양 예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이를 지상에 있을 때에도 비유로 말씀하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밧모 섬에 있던 사도 요한에게 임하셔서 계시로 보이셨습니다. 

필자 역시, 요한의 그 증거를 읽으면서 '나에게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주십사' 간구했고, 말씀을 읽기 시작한 지 20년 만에 '그리스도의 계시를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해는 곧 보혜사 성령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므로 기록된 모든 계시가 이루어질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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