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2020, 김종관
볕이 닿는 벽에 몸을 기댄다. 독이라도 탔을 거 같냐는 웃음 섞인 무심한 말투가 툭하고 나온 뒤 움직이는 모습이 새겨지며, 숟가락질과 함께 본격적인 전개의 페달이 돌아간다.
무엇이든 계기가 있다. 엎어진 그녀를 목격하고 도와준 후 밥을 얻어먹었고, 하필 무거운 서랍장을 옮기시는 할머니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도와드린 후 밥을 얻어먹었으며, 선물로 들어온 스팸을 갖다 준 후 밥을 얻어먹었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 특성상 밥정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상전급 위력을 지니고, 특히 자취러들에게 크리티컬 효과가 터지는 집밥 버프까지 붙었으니, 이들의 '계기'는 웬만한 로맨틱 레퍼토리들의 뺨을 후려치고도 남는다.
차분하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감정의 항해엔, 이따금씩 불어오는 얼척없는 거짓말 바람, 아슬아슬하고 편치 않은 몇몇 관계에 이어진 조타기, 위태로운 청춘의 고민과 걱정 물결, 이 세 콤비네이션이 스며들어 진득하게 늘어지는 골을 만든다.
계기 위에 쌓이는 계기들이 따스한 동력을 계속해서 뿜어내지만, 날카롭게 비집고 들어오는 현실의 서늘한 냉기가 그저 매섭기만 하다.
너와 함께라서 좋다는 말이 부유한다. 같이 쌓은 추억들과 기억들도 모빌처럼 매달린다. 둘 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으나, 같은 땅을 밟지는 못했다.
현실은 그렇게 가혹한 판단을, 아니 어쩌면 가장 최적의 판단을 내리게 한 건지도 모르겠다.
볕에 기대어 젖어가는 그의 눈가를 바라보며, 후자가 맞으리라는 확신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