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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별 Aug 26. 2021

너의 목을 내놓아라

영화 <그린 나이트> 꿀떡꿀떡 삼키기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다이아수저라 부릅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저 향락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는 듯한 가웨인이 이른바 보통의 계층이었다면, 등짝 스매시를 끼니 때마다 맞아도 딱히 할 말 없었을 테다. 허나 무엇이 걱정일까! 수저를, 그것도 어마어마한 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향후 인생 설계와 추진에 큰 문제는 없다.


왕의 조카라는 왕족 타이틀과 모자람 없는 튼튼한 신체 그리고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맹자 모친 남부럽지 않은 어머니, 이렇게 간단해 보이지만 자그마치 3개의 콤비네이션을 지닌 우리의 가웨인은 남들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만큼 몇 걸음은 더 앞선 조건으로 본격 출발선에 선다.


조금 더 지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사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전날까지도 놀고먹느라 외박을 일삼는, 이 한숨 생성기 아들을 위한 그 시대 한 어머니의 따숩고 사늘한 좌충우돌 분투기이겠다.



그루트 중세 버전

물론 좋은 조건 두둑한 가웨인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당시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을 '기사' 명함을 가지려면, 내가 언제 어디에서 좀 쳤었노라 하는 썰을 하나쯤 구비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라떼는~으로 시작하는 (구강)능력중심주의 앞에선 왕족이고 뭐고 썰 없으면 국물도 없는 꽤나 냉혹한 취급을 받아 마땅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날 왕이 가웨인을 불러 자신과 왕비 옆에 앉힌 건, 맨날 놀고먹는 한심한 조카에게 주제 파악을 강하게 각인시키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우리의 가웨인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다. 아들밖에 모르는 어머니가 뾰로롱 녹색 기사를 발송하여 토대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의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도발하는 녹색 기사에게 대응하는 이는 놀랍게도 그들 중 최약체 가웨인이다. 사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닿았다기보다는 썰없찐을 탈출하고픈 가웨인 스스로의 욕구가 불현듯 발현된 게 아닐까 싶다.



Lv.1 가웨인, 게임 스타트

목을 자르는 튜토리얼을 끝냈으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잘 들어맞듯 1년 가까이의 시간 동안 우리의 가웨인은 여전히 잘 놀고 잘 먹고 잘 취한다. 한심한 행보에 한숨이 나오지만, 패드립에는 바로 주먹을 박는 참트루 효도 펀치를 보아하니 그래도 정신머리는 꽉 붙잡고 있다는 게 증명된다. 몸소 가정방문으로까지 신경을 써주는 성은이 망극한 삼촌 알람이 울려서, 그리고 약속은 지켜야 하기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정에 나선다.


멋들어진 룩으로 늠름한 말을 타고, 뒤따르는 아이들은 시크하게 씹어주는 우리의 가웨인은 마치 벌써 진정한 기사라도 된 듯한 포스를 뿜어낸다. 하지만 아뿔싸! 인생은 결코 쉽지 않은 법. 초반부터 암초를 마주한다. 스파게티 먹방 1인자이자 포브스 선정 '마주치면 답도 없는 관상' 1위에 빛나는 배리가 하필이면 강도로 출연하고야 만 것이다. 효과는 굉장했고, 가웨인은 눈앞이 깜깜해졌으며, 자연과 함께 하는 눕방으로 여정은 아쉽지만 그렇게 스르르 막을 내린다.



본격 주인공 버프 발동

진짜 그럴 뻔도 했다. 만약 아담 맥케이 감독이었다면 거기서 바로 크레딧을 샤라락 올려버리는 장꾸 기질을 발휘했겠으나,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다소 진지함의 옥타브가 남다르기에 스르륵 패닝하는 심플한 묘수를 취한다.


우리의 가웨인은 두뇌 풀가동으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격언들을 쓱쓱 끌어모아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 정신머리 붙잡은 발버둥은 그렇게 생명 연장의 꿈을 이뤄낸다.


늠름했던 기사(진) 풀셋을 하루아침에 털려버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몸뚱이 하나뿐이다. 이런 굴욕적인 썰로는 (구강)능력중심주의 세상에선 오히려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가웨인은 내키지 않지만 일단은 명함을 얻기 위한 직진을 할 수밖에 없다. 간신히 묵을 곳을 찾게 되어 선침입 후실례로 잠자리를 차지하여 눈을 붙인 그는 주인의 등장에 화들짝 몸 둘 바를 모른다.


연못에 가라앉은 자신의 머리를 꺼내달라는 요상스러운 부탁에, 꺼내주면 무엇을 해줄 거냐는 보상심리를 노골적으로 들이미는 그는 나름의 냉철한 등가교환법칙을 띄운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고, 물로 들어가 붉은 빛을 마주하며 머리를 꺼낸다. 퀘스트를 완료한 보상으로 가웨인은(는) 잃어버렸던 도끼를(을) 획득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꿈같은 기회로 그는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ㄱㅇㅇ

이 쉽지 않은 여정을 함께 하는 졸귀탱 폭스를 또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폭스에게 처음엔 훠이훠이 화를 냈다가 조그마한 친절로 마음의 문을 연 그는 고독한 여정을 희석시킬 소중한 파트너를 얻는다.


더불어 도움도 받는다. 생각지도 못한 거인, 그것도 기행종, 그것도 초대형 거인을 만난 가웨인은 위기 아닌 위기에 처하는데, 폭스의 '짖기' 시전으로 초대형 내비게이션을 얻는 행운을 누린다.



뽀뽀 거부 불가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바스러지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포근한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또 한 번 화들짝 놀란다. 꽤나 규모 있는 성의 성주로부터 분에 넘치는 환영을 받으며 휴식을 취하게 되고, 마침 이 성이 최종 목적지인 녹색 예배당 당세권 입지인지라 모든 게 완벽하다. 물론 극한의 사냥 중독인 성주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성주 아내 그리고 눈을 가린 노파, 이 트리오의 오묘한 조합은 그저 아찔하지만.


코스믹 꺼꾸리 그림과 야간의 알찬 색깔론 강의와 그게 키스야?와 호흡이 가빠지는 어머머머 경험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가웨인은(는) 잃어버렸던 녹색 허리띠를(을) 획득했다! 얼떨결에 기사(진) 풀셋을 다시금 갖추게 된 그는 최종 목적지를 향하여 호다닥 걸음을 옮긴다. 이제 곧, 약속했던 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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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녹색 기사를 눈앞에 담고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 그 여백을 과연 가웨인은 어떤 색깔로 채웠을까. 그 기다림의 길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잠에서 깬 녹색 기사가 크리스마스인지 묻는다. 약속을 지키러 온 가웨인을 보고 기특하다 따위의 생각을 했을까? 별다른 틈을 두지 않고 곧바로 입맛을 다시며 쇼 미 더 넥을 읊조리는 그에게서 푸른 쿨내가 진동한다.


호기롭게 출발했으나 파란만장한 여정으로 속내는 누더기가 되었을 가웨인이 드디어 목 없는 결말로 치닫기 일보 직전이다. 그는 누구처럼 목이 잘려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설 수 있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결말이 반가울 리 없다. 쫄보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겁부터 집어먹을 테다. 물론 녹색 기사 입장에선 눈앞의 대상이 겁을 먹든 말든 딱히 관심 없고, 그저 저 탐스러운 목을 향한 풀 스윙이 고플 뿐이다.



난 왕이 될 상이란 말예요

드디어 내려치는 절체절명의 순간, 우리의 가웨인은 혼비백산하며 잠깐만 찬스를 외친 뒤 부리나케 예배당에서 퇴장한다. 생사의 경계에서 찰박거리는 가웨인을 그 누가 함부로 한심하다 쏘아댈 수 있으랴. 무한한 생략으로 집 앞에 당도한 가웨인은 나름의 원대한 썰을 풀었을 것이고, 그 나불거림은 (구강)능력중심주의 사회에서도 탑 티어 수준이라 왕족의 피까지 흐르는 그의 즉위엔 더이상 브레이크가 없다.


허나 왕이라는 자리는 결코 쉽지 않은 법. 모든 행보를 계급과 명분과 실리에 맞춰야 하기에, 그는 많은 것을 버리고 또 많은 것을 취해간다. 이후 차례차례 닥쳐오는 온갖 비극들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들일까? 많은 것을 버리고 취했던 많은 것도 하나둘씩 가웨인을 떠나간다. 마침내, 가웨인의 목마저 가웨인을 떠나간다.



결말은 우리 안에

다시, 가웨인은 녹색 기사 앞에 존재한다. 꿈일지, 상상일지, 예정된 미래일지, 아무것도 아닐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달라져야 한다는 건 알겠다. 녹색 허리띠를 풀자마자 떠나갔던 목을 상기한다. 풀었던 게 미련일까 족쇄일까 굴레일까 잡념일까 용기일까 운명일까 아니면 그저 토끼발에 불과할까. 허리띠를 풀고 다시금 결말로의 자세를 고쳐 잡는 가웨인의 존재가 한층 더 또렷해진다.


이제 정말로, 녹색 기사의 도끼가 '기사'의 목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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