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다사다난한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글 쓰는 시간이, 너무 평화롭고 고요하게 느껴진다.
어제 저녁부터 나는 새로운 곳에 둥지를 텄다. 아주 신기하게도, 그토록 지도를 펼쳐놓고 들여다보던 장소, 가장 좋아하는 공원이 있고, 학교와 교회가 가까운, 그런데 집세 부담까지 적은.. 꿈꾸던 것이 그대로 실현됬다. 그래서.. 실감이 잘 안된다.
지난 한주는 꽤 힘들었다. 월요일 점심에 먹었던 덜익은 쌀로 한 김밥에 체한 덕분에 몸안의 모든 음식물들을 (특히)위로 다 꺼내는 시간을 보냈다. 구토, 복통이 가시지 않고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주여를 매순간 외쳤다. 정말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그 뿐이었다. 같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도움을 요청하기에 어려웠다. 응급실에 갈거야? 그들한테 부탁할만큼 가까워? 결국 그정돈 아니고 너는 혼자야. 하는 우중충한 생각들이 뿜어져나왔다.
사실 내가 아픈것을 김밥의 탓으로만 돌리기엔 김밥이 억울할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주에 시작된 비자문제였던게 가장 큰 원인이니까. 준비했던 서류가 거절되면서, 새로운 시도 중.. 안될꺼라는 주변의 만류 (내 입장이 아닌 그들의 입장에서 아쉬우니), 마음같이 빠른시일내에 도와주지 않는 서류 등이 길을 잃은 사람처럼 두려웠다. 눈을 감고 뜨는 시간 모두 그 생각으로 머리가 차있었다. 그러니, 아프단 이야기에 아빠가 '무슨 다른 일 있니?'하는 질문이 가장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아빠는 날 안다.
결국 화요일 모든 일을 취소했다. 아주 긴 화요일, 특히 그 화요일은 나의 모든 일 팀이 우리 아뜰리에에 와서 참관하는 날이었는데, 수업을 쨌다. 아프니, 물리적 거리가 느껴진다. 긴 시간동안 교통수단을 이용하는것이 큰 부담이된다. 사실 건강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그래도.. 그동네에서 살 순 없어. 차를 살 수도 없어..
하필 또.. 수요일 오전에 한달에 한번있는 데모스 뚜띠가 있었다. 그것도 취소했다. 그것은 비자를 해결하기위한 차원에서 였는데, 이전에 조일라가 조언해준 cimade라는 곳에 가서 무료 변호사 상담을 받는 것이었다. 아침 9시반에 시작되는 상담센터에 9시반에 도착했는데, 이미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만 아시아인이었고, 98%이상 아프리카인들, 아주 가끔 라틴계열 사람들.. 그리고 나 혼자 아시아인이었다. 그들이 선 줄은 나와 차원이 다른 비자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한시간을 기다려 '무엇때문에 왔느냐'라는 질문에 예술인 비자 신청하고 싶다고 하니.. 잠시 말을 머뭇거리면서 '너가 보다시피 우리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 원하면 다른 cimade를 소개해줄게.' 하며 나를 거절했다. 당신네들의 전문분야가 아닐 수 있고, 내 비자의 문제가 다른 이들의 비자에 비하면 우스운 일일 수 있으나.. 나또한 절박했고, 그의 거절에 상심했다.
마침 17구였기에, 올해 6월까지 다니던 학교에 찾아가 연락없는 디플롬을 받으려 갔다. 메일은 이미 전날 보내놨었고, 면대면으로 맞짱을 뜨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 곧장 행정실을 찾았다. 담당자를 만나니, 그도 답답한게 우리 학과장 흐벨이 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린 둘이 같이 그의 사무실을 찾았고, 그는 없었다. 긴급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그에게 메일을 보냈고, 5분만에 답이왔는데, 너가 수강한 수업들 모두 목차 정리해서 보내라고 했다. 그래서 또 그일을 한동안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수업 확인증을 받아냈다.
그리고, 예약해둔 박스를 받으러 엉떼흐막셰에 갔다. 다행히 어제 부탁했던 직원을 만날 수 있었고, 그에게서 나는 스무개 가까이 되는 박스를 받았다. 작년 이사때도 그랬지만, 이사날보다 더 기억나는 박스 이동이 가장 어려웠는데, 머리에 지고 오려다, 결국, 테이프와 밧줄을 둘러매 어깨에 지고 왔다. 그리고 이삿짐의 95%를 완료했다. 수요일부터 이사가는 토요일까지 집에 사는게 아니라 창고에 사는 것 같았다. 엄마 왈 '그래서, 지저분한 집 보면, 이사가는집 같다라고 하자나'라고 했다. 그렇구나.. 더이상 내 집이 아닌 것 같았다.
목요일에 학교를 가니 아이들이 너 몇일동안 학교에 없었다며, 나의 결석에 대한 인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고마웠다. 수업도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냈다. 점심시간 사유리와 도미닉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것,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거리를 함께 체크해준것도 고마웠다. 오후 한시반에 관찰수업이 있었는데, 작년에도 그랬듯, 화상화면으로 내 수업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아이들이 수업 집중을 잘 못했고, 다른말을 잔뜩하는 것 같았다. 원래는 제일 쉬운 그룹인데..;; 내가 집중을 못한건가, 아님 그날따라 그렇게 내가 느끼는것인가.. 여튼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금요일엔 파트릭을 마주쳤는데, 내게 주려고 P1harmony와 bts 포스터 대자로 8장을 주었다. 정말.. 이사가는 전날 짐스러움을 그는 모를것이다. 우야튼 나를 생각해주는 것도 고마웠다. 덕분에 한국 그룹에 대해 알아간다. 정말이지 그들의 영향력이 크게 지배하는 것 같다.
페도라가 준비해준 저녁은.. 장막과 안과도 함께 하는 저녁이었는데, 샐러드, 파스타, 그리고 디저트까지, 몇일 굶었던 배를 제대로 채워줬다. 그리고 나의 이사보다 더 충격적으로.. 그녀는 월요일에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알렸다. 내 뒷 사람을 찾아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오프만 가족에게 아쉬워지는 상황이된것 같다. 페도라가 이야기하는 걸로봐선 그렇게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지만.. 떠나야한다고 했고, 떠나게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은 시기에 떠나게 된것도 어찌보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된 것 같아 감사하기도 하다.
토요일 아침 10시반 이사계획을 오후 2시로 옮겼는데, 그것도 참 다행이었다. 나름 깨끗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청소할 곳이 너무 많았다. 1분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삿짐차가 오기전까지 움직여야했다. 운전사가 한시간 땡겨도 되냐고 연락와서, 덕분에 한시까지 했지, 시간이 더 있었다면 청소를 찾아 계속 했었을것이다. 장막은 운전사와 나를 위해 커피와 빵을 준비해줬는데, 운전사는 결국 먹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에 무언가 느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로 아주 몸이 부서질만큼 세게 안아주었다. 솔직히 안만 있었다면, 살기 어려웠을것이다. 예민하고 불편하게 종종 표현하는 안에 비해, 장막이 아빠처럼 들어주고 도와주고 유머도 던지니 편안하게 지냈던 시간이었다. 감사함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운전사는 19살,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애였는데, 미래에 대한 고민이 꽤 무겁에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자신은 돈이 너무 좋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한다고 했다. 꽤나 슬프고 특별한 대화였다. 모로코에서 온 세잇남은 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교육받고 자란것 같았다. 아버지 말씀이 informatique이 돈이 더 된다고 했다고 했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가 돈을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와 다 나누지 못했던 그의 삶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쉽사리,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말하진 못했다. 그래도, 19.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그 나이, 호기심있게 여기저기 기웃거려볼 나이에, 실패할까봐 두렵다고 말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열아홉의 나를 보는것 같기도했다. 세잇남은 친구들과 아주 할일이 없을때 스튜디오에 가서 음악 녹음을 한다고 했는데, 그가 녹음한 세 음악이 꽤 수준이 높았다. 랩에 대한 것은 전혀 모르는 내가 들어도, 꽤 수준이 있어보였다. 그는 그것이 전혀 직업으로 삼고싶은만큼은 아니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돈이 되지 않을거라는 생각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돈보다 더 가치있는게 있으니, 두루고루 살피며 너의 삶의 목적에 맞게 살아.. 라는 이야기. 자주 해주고 싶은 소년이었다.
레베카와 마누.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두번 이상 나를 insist 해서 돕겠다고해준 친구들.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해줄것은 없었다. 세잇남이 건물까지 옮겨주는 것 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녀들이 보여준 정성에 나도 함께하고싶었다.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이삿짐을 그냥 밀어넣고 이제.. 4분이면 도착하는 교회에 가 귀걸이와 카드.. 그리고 마누가 추천해준 꽃병을 샀다. 너 꽃병 필요하다했잖아. rejoice in the Lord 심지어 초록색이야 ! 여러모로 내게 와야했던 꽃병. 일카의 미국인 친구가 1997년에 만든 꽃병. 베네딕트 엄마가 그린 그림의 카드, 로라가 만든 귀걸이.. 지인들의 정성이 담긴것을 사는 것이 돈 이상의 특별함이 있었다. 집에 가기전에 꽃집에 들러 꽃병을 채웠다. 이삿짐 박스로 정신없는 내 방에 희망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방의 온도, 침대.. 변화로 인해 잠은 제대로 못잤지만, 아침에 일어나 밖에 보니 첫눈이 내렸다. 이사 첫날, 맞이하는 첫눈에,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나의 Rejoice in the Lord가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된것 같다. 오늘 앙드레가 예배에서 말했듯, 하나님은 우리를 즐거운 놀라움 거리로 채워주시는 것을 좋아해, 라는 말이. 와닿고, 그 말을 잡고 싶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 나의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라, 모든 상황속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나도 자연스레 방향을 트는, 그리고 그가 준비한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다윗같은 믿음을 갖고 싶다고. 새로운 친구들, 엠마, 스하드, 샤흘리, 마리옹, 카트린, 줄리아, 이지스, 마리클로드, 테사.. 그들이 가진 꿈과 노력에 영감도 받는다. 감사하다 이 곳에 함께하게 해주심에 ! 하나님, 저 여전히 기대하고 설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