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새벽하늘을 보며

by 지금은

여러 날 이어지는 비였다. 이맘때쯤이면 가을 햇살이 따사롭게 들고, 들판은 누런빛으로 물이 들기 시작하는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올해는 비가 멈출 줄을 몰랐다. 하루, 이틀, 사흘……. 장마철도 아닌데 마치 가을장마라도 온 듯 연일 비가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새 추적추적, 또 때로는 억수같이 쏟아지며 온 세상을 눅눅하게 적셨다. 그 탓인지 공기에는 늘 축축하고, 하늘은 회색빛 구름에 가려 단 한 번도 맑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날씨가 우중충하면 사람 마음도 그 빛을 닮는 법이다. 요 며칠 내내 기분이 가라앉았다. 괜히 말수가 줄고, 음악을 들어도 가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 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마음속에도 비가 내리는 듯했다. 단풍이 제대로 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햇빛이 고와야 단풍도 곱게 드는 법인데, 이렇게 비가 그치지 않으면 나무들은 제때 옷을 갈아입지 못할 테니까.

더구나 나들이라도 하려면 늘 우산을 들어야 했다. 그 작은 물건 하나가 이렇게 번거로운 줄은 미처 몰랐다. 손 하나가 묶여버리면 마음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비가 오는 길을 걷는 낭만도 하루이틀이지, 며칠째 이어지면 그저 불편할 뿐이다.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신발을 적시고, 축축해진 바짓가랑이가 종일 찝찝했다. 이러니 나갈 마음도, 누굴 만나고 싶은 마음도 점점 줄어들었다. 며칠째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다.

오늘 새벽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잠이 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득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가슴이 묘하게 시원하게 느껴졌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걷었다.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었다. 어둠이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하늘에, 구름은 마치 물러나는 구경꾼들처럼 느릿느릿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푸른빛이 비집고 들어와 세상을 다시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푸름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잿빛 구름 속에 갇혀 있던 날들 동안, 잊고 있던 색이었다. 하늘은 마치 오랜 친구가 찾아온 듯 반가웠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눅눅하던 생각들이 마치 바람에 쓸려나가는 듯 가벼워졌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며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터져 나왔다. 나는 두 팔을 높이 들어 마음껏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느끼는 개운함이다. 세상이 다시 시작되는 듯 아침, 모든 게 새로워 보였다. 하늘은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파란색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구름의 가장자리는 금빛으로 빛났고, 집 앞 가로수 잎사귀에도 이슬방울이 반짝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들떴다. 이렇게 맑은 날이라면, 무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베란다에 나섰다. 마른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동쪽 하늘로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붉은빛이 서서히 번져 나가며 파란 하늘과 섞이자, 세상은 단숨에 색을 되찾았다. 그 순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어디론가 나들이해야겠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집 안에만 갇혀 있던 몸이 반응하듯 가볍게 움직였다. 비 때문에 미뤄둔 길, 가보지 못한 곳들이 떠올랐다. 산책로의 단풍나무들이 지금쯤 어떤 색을 띠었을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물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지금, 이 순간처럼, 완전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니까.

하늘이 맑게 갠다는 건 단지 비가 멈췄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쌓인 먹구름도 함께 걷히는 듯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인생에도 이런 날이 있다고. 아무리 길게 비가 내려도, 결국은 이렇게 맑게 갠 하늘이 찾아온다고.’

비로소 깨달았다. 새벽의 하늘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약속 같은 것이다. 어둠 뒤에는 언제나 새벽이, 비 뒤에는 언제나 푸른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천히 문을 나섰다. 비에 젖어 미끄럽던 골목길이 군데군데 마른 빛을 띠고 있다. 새벽 햇살이 담벼락에 부딪혀 반짝거렸다. 어디로 향하든 좋다. 발걸음이 가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몇 일만에 세상 속으로 발을 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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