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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 Oct 20. 2024

물고기 수컷의 알, 그리고 카오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것의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수천 리나 되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곤이 변해서 새가 되었는데 그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은 수천 리나 되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다. 붕이 솟구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폭풍이 일 때 그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간다. 남쪽 바다 그곳은 하늘만큼 크나큰 못이다."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장자 특유의 과장과 풍자를 보여주는 글이다. 이 글에 등장하는 곤鯤은 상상 속 거대 물고기를 뜻하는 동시에 물고기의 수컷 정액을 말한다. 그러므로 은 가장 작지만 가장 크다. 만물을 잉태한 태초의 씨알이자 빅뱅이다. 곤이 그 응축된 힘을 펼쳐 넓은 바다를 헤엄치고, 솟구쳐서 하늘을 자유롭게 비상하려면, 먼저 암컷을 만나야 한다.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응축하고 있는 수컷 정액(陽)이 암컷(陰)을 만나 서로 사귀는 것을 곤이라 한다. 

       금문         소전


곤昆의 금문(갑골문은 발견되지 않았다)은 태양을 그린 날 일日과 그 아래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그린 나란할 비比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곤은 원래 태양이 사람들의 정수리와 일직선을 이루는 때인 '정오'를 가리킨다. 


태양이 하늘의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르는 정오에서 '가장 높다, 가장 밝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후 인간세상에서 가장 높고 빛나는 존재, 즉 지위나 서열의 우두머리를 뜻하게 되면서 형제 중의 '맏이'라는 뜻이 나왔다. 


고대 중국의 신화에서 하늘 아래 첫 번째 산으로 등장하는 곤륜산 곤崑, 장자가 언급한 상상 속의 거대 물고기를 뜻하는 곤어 곤鯤, 조선시대 치도곤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몽둥이를 뜻했던  곤장 곤 에서 곤昆은 가장 높거나 가장 크다를 뜻한다. 


한편 정오(昆)는 낮 12시 태양이 표준 자오선에 이른 순간으로 음과 양이 교차하는 때이다. 음양을 크게 구분하면, 태양이 떠오르는 오전은 양(陽), 해가 지는 오후는 음(陰)의 시간이다. 그 교차지점을 태양이 지나는 모습에서 '뒤섞이다, 교환하다'라는 뜻이 나왔다. 이로부터 혼돈混沌이란 말이 나왔다. 섞일 혼混은 두 강이 만나서 뒤섞이며 소용돌이를 치는 강의 합수부를 말하며, 막힐 돈沌은 물이  진을 치고 있다는 뜻으로 물이 흐르지 않아서 혼탁함(어두움)을 말한다. 이와 같은 물의 혼돈을 고대 바빌로니아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의 첫째 토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에 하늘이 이름 지어지지 않았고

밑에 마른땅이 이름으로 불려지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그들(신들)의 아버지 앞수(지하수)와 

그들 모두를 낳을 모체 티아마트(바다)는 

자기네들의 물을 하나로 섞고 있었다."


한편 중국의 『회남자』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하늘과 땅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 다만 어슴푸레한 모습(倱흐릿할 혼)만 있었고, 형체는 없었으며 어둑어둑할 뿐이었다" 


이렇듯 곤은 음양의 교차지점인 정오에서 '뒤섞이다'는 뜻이 나왔고, 이로부터 두 강이 만나 소용돌이를 치며 혼탁한 모습처럼, 음양이 분리되지 않고 뒤섞여서 혼돈하는 태고의 카오스를 뜻하게 되었다. 


어느 민족이든지 저마다의 창조신화가 있다. 창조신화의 대부분은 혼돈으로부터 세상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혼돈은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의 우주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만 신화에서는 혼돈이 인격화된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중국의 오래된 신화집 [산해경]에서는 혼돈을 기이한 생명체로 묘사하였다. 금과 옥이 많이 나는 천산이라는 곳의 신은 제강이다. 제강은 그 모습이 기이하다. 몸은 곡식이 담긴 자루 같이 생겼는데, 얼굴이 없다. 얼굴이 없는데도 춤과 노래를 잘한다. 피부색은 붉어서 빨간 불꽃같고, 여섯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가 달렸다.


태초의 혼돈을 상징하는 생명체를 만들어내다 보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생명체를 상상하게 된 것이다. 얼굴이 없는 것은 아직 세상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며, 춤과 노래는 혼돈混沌하는 우주의 움직임과 소리를, 타는 듯이 붉은 피부는 에너지가 응축하여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를, 여섯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는 응축된 에너지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결국, 혼돈의 신 제강의 모습은 지금 인간의 머리 꼭대기를 지나고 있는 태양이(昆) 그 옛날 자정에 있을 때(태고)의 우주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낸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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