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J

10년 전, 10년째 어땠지?

by 이성화

남편의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던 중, 남편의 별명이 ‘J’라며 무슨 뜻인지 알겠냐고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게 영감쟁이의 사투리인 ‘영감재이’에서 ‘J’가 되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이름의 발음이 ‘영감’과 비슷해서 생긴 별명이었다는 추가 설명도 있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어쩐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J는 성실, 정직, 책임감, 뭐 그런 반듯하지만 재미없는 사람이라 영감이란 별명이 딱 들어맞았다. 말도 많지 않고 느긋해 보이는 표정까지 ‘영감님’과 많이 닮아 보였다.


그는 누가 뭐라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때론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옳다고 믿는 자신의 길만 고집하는 고집J(쟁이)기도 했다. 월급 받을 땐 월급의 몇 배가 되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기 사업을 시작한 후엔 그보다 몇십 곱절의 일을 해냈다.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생활의 달인’에 안 나왔을 뿐이지, 니트 가공 공장의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달인이었다. 그런 사람이 처자식을 굶기다시피 하며 여기저기 돈을 빌리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는가. 그래서 남편은 허구한 날 밤새워 일하고, 쉬는 날은 거의 없었다.


비빌 언덕도 없이 맨땅에서 시작한 사업은 하면 할수록 어려워지기만 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더 많이 일했지만 늘어나는 것은 한숨과 대출이자뿐이었다. 고집J는 납품하고 대금을 못 받는 경우는 있어도 하청업체에 줘야 하는 금액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급해 줬다. 폐업신고를 한 지 몇 년이 후까지도 그때 다 주지 못한 대금을 꾸역꾸역 갚아줬다. 하늘이 냈지 싶은 고집과 뚝심이었다. 내가 떼 먹혔다고 남의 돈을 떼먹는 건 당연히 안 될 일이었지만, 그 당연하고 옳은 일을 하는 남편이 아내 된 입장에서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죽하면 역사적으로 존경받아 마땅한 의병이나 독립투사의 아내들도 나처럼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을 생각하며 위안 삼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독립투사는 역사에 길이 이름이라도 남지, 그 아내들은 뭐가 남았을까 싶기도 했다. 내 좁은 속을 알았는지 J의 고집은 역사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그런저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남편은 그렇게 미련스러울 정도로 꿋꿋하게 버텨냈다. 돈복은 없는지 몰라도 일복, 인복은 참 많았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 그 됨됨이를 칭찬하며 성공을 빌어줬다. 일 잘한다며 일감을 주겠다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지만 ‘영감님’은 사업을 하기엔 적당하지 않았다. 사업을 하다 보면 남들 대하는 데 있어서 모질고 독한 면도 있어야 한다는데, 도무지 그런 면이 없었다. 그저 좋은 사람일 뿐.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야단치거나 큰소리 내는 것도 싫어해서 그가 있을 때는 되도록 조용히 말했다. 다섯 명의 누이들도 하나같이 그가 성실하지만, 너무 순하고 모질지 못해 사업하기엔 힘들 거라는 얘기들을 했다.


그렇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너그러운 J가 야박하게 구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집.사.람. 그는 다른 사람에게 처를 소개할 때 늘 ‘집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는 왠지 ‘집사람’이라는 표현이 ‘집오리’, ‘집토끼’, ‘집돼지’ 같은 느낌이어서 싫었다. 그래서 그 표현이 싫다고 얘기했더니 “별것도 아닌 것을…. 알았어, 알았어. 됐어.” 하고 말았다. 내가 뭐라 조금 잔소리할라치면 늘 나오는 반응이었다.


농담 반, 진담 반, 남편은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 그렇다고 해도 진심으로 서운할 때도 많았다. 공장일을 거들 때는 일 못한다고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 앞에서 면박 주는 일도 잦았다. 화나서 그런 건 아니라지만, 본인이 힘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거친 말투로 얘기해서 싸움도 여러 번 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기에 더 속상했고, 서운한 마음에 싸움을 걸어 봐도 “됐어, 그만하자.”가 다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선 우리 마누라가 최고라는 둥, 자기가 꼼짝 못 하고 산다는 둥, 너스레를 떠는 통에 남편이 잘해 줘서 좋겠다는 소릴 듣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둘만 있을 때는 “아들(아이들)은? 밥 묵자, 고마 자자.” 하는 경상도 남자일 뿐인데 말이다. 결혼 전엔 너그러운 ‘영감님’ 같더니 결혼 후엔 꼬장꼬장한 ‘영감J’가 되고 말았다.

J는 참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 결혼 후 10년 동안 병원에 간 것은 치질 수술 때뿐이었고, 두어 번 걸렸던 심한 몸살도 하룻밤 푹 자고 나면 거뜬했다. 그래서인지 병원 가라는 말은 절대 듣지 않고, 감기 기운이 있다 싶어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이라도 사다 먹이려면 인상을 있는 대로 썼다. 주사라면 10리 밖으로 도망갈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하던 공장을 접고 친한 형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도 나눠서 하고 이익도 나눠 가지기로 했단다. ‘큰 소리 내느니 내가 좀 손해 보고 말지.’ 하는 성격의 J가 또 손해 보는 장사를 시작한 게 아닐까 걱정은 됐지만, 그 고집을 알기에 말리지도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형님도 일을 지독할 정도로 열심히, 많이 하는지라 퇴근 시간은 늘 자정을 넘겼다. 주말에는 그나마 저녁 7~8시. 일요일도 거의 쉬지를 못했다.

어느 일요일, 저녁을 준비하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손가락을 조금 다쳐서 건대병원에 왔는데, 주사 맞고 좀 늦을 거 같아.”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많이 다친 듯했다.

“살 잘렸어?”

생각할 틈을 안 주려고 얼른 물어봤다. 대답을 얼버무리는 그에게 다시 몇 바늘 꿰맸냐, 물으니 열댓 바늘 꿰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손가락을 열 바늘 넘게 꿰맸다면 많이 다친 게 아닌가.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20년 넘게 한 일인데,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었다. 내가 살짝 부딪치거나 넘어지면 조심하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10시가 다 되어 왼쪽 가운뎃손가락에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손가락 끝 반 마디가 손톱 부분만 남고 재단기계에 뼈까지 잘린 사고였다. 신경도 잘렸지만 수술해 봐야 손끝은 회복이 힘들 거라는 말에 수술도 입원도 마다하고 주사만 맞고 집으로 온 거였다. 마누라가 보험일 시작했다고 보험금 타는 연습 시키려고 그랬냐는 농담을 하면서도 그 손으로 다음날부터 바로 일을 할 그가 안쓰러웠다.


J는 건강한 체질을 자랑하려는 듯 3주 만에 붕대를 풀었다. 뼈는 덜 붙었지만 의사가 그만 와도 된다고 했다며 피딱지가 낀 긴 손톱을 자랑스레 쳐들고 돌아왔다. 하필 가운뎃손가락이라 욕하는 거 같으니 좀 치우래도 자꾸 들이대며 봐달라는데, 그럴 땐 네 살 막내랑 하는 짓이 똑같았다. 손에 물 들어갈까 봐 샤워 못 하고 자야겠다는 걸, 씻겨준다며 반강제로 화장실로 밀어 넣을 때는 막내보다 더하다 싶기도 했다.

불편한 손으로 매일 열여섯 시간씩이나 아이롱대 앞에 서서 니트를 다리고, 재단하고, 부속품과 완성품을 4층까지 지고 들고 오르내렸을 J. 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표현이 서툴 뿐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니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 편안한 마누라에게만은 친절함을 벗고 민낯을 보여주는 것도 알고는 있다. 말은 뻥뻥 공 차대듯 해도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찬성해 줬다. 기분 좋을 땐 내게도 친절하고 재미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사고를 겪으며 보니 남편은 손가락 끄트머리까지 아내 걱정을 먼저 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남편, 당신 편이 되어줄 차례다. 내일 아침, 밥 먹자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이불속으로 파고들어도 얼마나 피곤하면 그러겠냐며 엉덩이 두드려주는 일부터 도전해 봐야겠다. 두드려 패는 기분이 들지 않게 조심하며 말이다.


진짜 ‘영감님’이 될 때까지 매일매일 도전의 연속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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