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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Aug 01. 2021

감시받지 않을 자유를 꿈꾸며.

코로나야 물러가라.

오늘도 어김없이 수통의 안전 문자를 받았다. 어느 지역 '어느 매장에 방문 한 사람은 코로나 검사를 받으세요' 하는 내용도 있었다. 요즘 같은 때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인간들은 무슨 정신일까. 하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라도 사람들은 삶을 유지하는구나 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전쟁통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나누고 사업을 확장하고 정치도 하고, 꿈도 꾸니까.


문득 카드 사용 내역서를 들여다봤다. 외식을 하지 않은지 제법 오래됐지만 그래도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자가 검열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카드 내역서를 보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물론 처음 경험하는 일은 아니다. 어딜 가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CCTV가 나를 감시하는 것인지 보호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도 있고, 지난해 한동안 나의 카드 사용내역서를 따라 나의 동선이 탈탈 털리는 악몽을 꾸기도 했으니까.      


지난 2020년 봄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감시와 밀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우리 집에도 영국과 캐나다에서 입국한 자가 격리자가 둘 있었다. 딸들은 각자 방에서 꼼짝도 못 했고 남편은 집을 나가 따로 살았다. 온 집안에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나는 다 큰 두 딸에게 하루 세끼 밥을 차리며  혹시 딸들이 묻혀왔을지도 모르는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꼬박 2주 동안 정부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강도 높은 격리 생활을 했다.       


심지어 아이들과 한집에 있으면서도 각자 방에서 메신저로 통화를 했다.   아이들은  가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때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했다. 70% 알코올이 담겨있는 분무기를 하나씩 들고 다니며 각자 손이 닿은 곳을 어김없이 소독했다. 덕분에 나는 다 큰 자식들 하루 세끼 밥을 차려 각자 방에 넣어 주고 뒷정리를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내 평생에 그렇게 열심히 집안을 쓸고 닦아본 적도, 하루 세끼 집밥을 2주 내내 차려 본 적도 없었다. 방 안에서 나올 수 없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매 끼니마다 무슨 맛있는 반찬을 해줄까 고민을 하다 보면 또 밥시간이 돌아오곤 했다.     

 

설거지할 때도 마스크를 쓰고 커다란 찜솥에 물을 끓여 모든 식기를 열탕 소독했다. 딸들은 엄마가 ‘신경질적’이다 싶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각자 알아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서도 마음속에서  ‘민폐’라는 단어가 자꾸 나를 불안하게 했다.  해외 입국자 딸들이 바이러스를 나라 밖에서 끌고 들어온 것도 모자라 확산까지 시켰다며 손가락질당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당시 뉴스에서 어느 특정인의 감염 경로와 동선이 공개될 때마다 내 동선을 돌아보고 어느 한구석이라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뭔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예민한 이유가 뭘까 싶었다. 그런데 마침 프랑스의 어떤 변호사가 한국이 감시와 밀고의 나라라고 말한 기사를 보게 됐다. 코로나의 확산을 막은 것은 마치 빅브라더 같은 감시 체제 덕이라며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대한민국은 분명 내가 경험한 7~80년대 무시무시한 군부 독재 시절의 아날로그적 감시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감시와 밀고의 세계였다.  


어느 술집에서 자가격리 대상자가 술을 마시며 자가격리를 위반한 내용을 자랑이라도 하듯 떠들어댔고 옆자리에서 대화 내용을 들은 사람이 ‘당국’에 신고를 했다는 뉴스를 보고 감정이 이상에게 뒤틀렸다.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확진자의 동선을 더 이상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완벽하게 감시하고 있다.


     

나는 사실 감시와 밀고의 세상을 혐오했다. 그 내면에는 초등학교를 다닐 때 배운 북한의 5호 담당제에 대한 공포와 맞닿아 있었다. ‘인민’끼리 서로 감시하며 밀고하는 치졸하고 비겁한 체제에 대한 혐오가 그 뿌리였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북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고 나면 침을 땅바닥에 세 번 뱉어서 내 입을 정화했을 정도로 북한을 혐오했었다. 북한의 그 무시무시한 공산당들이 남침을 해서 남한의 점령하면 내 이웃이나 부모형제도 나를 감시하고 밀고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한몫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5호 담당제 못지않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감시와 밀고의 역사를 오래 겪었다. 내가 밀고당하지 않기 위해서 입조심을 했고 아무나 만날 수도 없던 시절이 그다지 멀지 않은 역사 속에 있다. 항상 수상한 사람을 보면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살아야 했다. 간첩을 보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고초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중학교 때 ‘선생님이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던 같은 반 친구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80년대 , 가장 안전해야 하는 학교 안에서 마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의심하고 경계했다.  불심검문에서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몰라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을 하고 문 밖을 나서야 할 때가 있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어김없이 ‘프락치’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반드시 ‘타도’ 해야 하는 군부 독재의 시절에 신념을 위해서 열정을 불살랐던 사람들은 정보기관의 사찰 대상이 되곤 했다. 불과 몇십 년 전에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았다.     


그런 시대를 살았던 경험 탓인지 나는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 나의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했었다.  서양 범죄자들의 험악한 머그샷을 볼 때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내 던져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한국의 범죄자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방식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독재 시대의 정보기관이 아닌 CCTV와 내비게이션과 신용카드 내역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거부감보다는 의무감으로 순순히 감시받는 것에 순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캐나다에 살 때는 범죄에 취약한 지역에서 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던 CCTV가 한국은 어디에서나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어색하고 거부감이 들면서도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교차했다. 아마도 내가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나를 안심시키는 것 일터이다. 그렇지만 가끔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혹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감시가 강화되어 왔기 때문에 이 삶이 단지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내가 지난해 딸들과 강도 높은 자가격리를 한이유가 단지 코로나가 무서워서라기보다 내 동선이 탈탈 털려 남들에게 까발려지고 손가락질받는 것이 더 공포스러웠다고 말한다면 그대들은 이해해줄까. 그 덕분에 우리는 그나마 다른 나라보다 코로나로부터 보호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한국에는 나처럼 남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워 열심히 거리두기를 한 사람이 제법 많을 테니까. 요즘 코로나 확진자가 1500명을 웃돌고 있으니 왠지 더 감시하고 더 규제를 강화하라고 말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가 될 테니까.


스마트폰, 카드 사용 내역이, CCTV. 가  나를 보호해주겠지. 나는 이제 감시받지 않을 자유보다 나의 안전이 우선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편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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