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희범 Aug 01. 2024

메디아 루나 - 오쵸 10

사무실에 들어서자 컴퓨터가 놓인 책상 하나와 세 개의 의자가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조이는 우리를 마주 보고 앉히고, 자신은 책상 의자에 앉았다. 마치 학생 시절 선생님께 면담을 받던 것처럼, 우리 둘은 선생님과 대치하듯 앉아 있었다. 조이는 책상을 정리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이렇게 큰 소리까지 내며 다투다니, 혹시 아카데미에 두 분만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성인이라면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끼칠 영향을 아실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여기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갑시다."     


조이는 마치 제자들을 깨우치는 스승처럼 묻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화를 내며 싸웠냐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 묘한 중압감을 느꼈다. 처음 조이를 만났을 때에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조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스승님의 조언처럼 깊이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원을 그만두었을 때, 스승님께선 여러 차례 나를 걱정하며 연락을 주셨지만, 죄스러운 마음에 연락을 피했고, 문자로만 짧게 대답을 드리곤 했다. 가끔 메신저로 보내오는 스승님의 법문 말씀을 받을 때면, 그저 스쳐 지나가듯 읽고는 제대로 답장을 드리지 않았다. 그런 죄책감 때문일까. 조이를 보면 스승님이 떠오르곤 했다. 탱고를 배우기로 결심했던 첫날 조이의 한마디는 나에게 그리도 깊이 남아 있었다.     


"탱고는 이성을 유혹하는 수단이 아니에요. 여자를 만나고 싶어서 하는 거라면 차라리 다른 춤을 추천하겠습니다. 탱고는 삶을 배우는 춤이란 걸 잊지마세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을."


그 말이 나를 움직였다. 그렇기에 그때 나는 조이에게 내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았고, 조이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자, 조이는 내게 탱고를 적극 권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조이를 대할 때면 나는 어린이가 되는 느낌이었다.       


"두 분 다 아무 말도 안 하실 건가요? 다시 물을게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우리를 보며 조이는 다시 물었다. 그 말에 먼저 입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아나를 보며 조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불만족스러울 수 있지만, 그런 부분들을 인내하고 배려하는 게 파트너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배려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오늘 저는 그 배려를 느낄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하, 배려요?" 

엘리아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먼저 짜증을 팍팍 내면서 분위기를 망친 게 데이빗 님이셨는데요? 그게 제 탓이라는 말인가요?"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반박했다. 그런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은 채 조이에게 말했다.


"저는 최대한 참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엘리아나 님께서 리드가 거칠다며 불만을 표하고, 저를 루크 님과 비교하면서 공격하셨잖아요? 저도 화가 날 수밖에 없지 않았겠어요?”     

그러자 조이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실망스러운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


"데이빗 님, 서로 불만이 생기면 직접 해결해야지, 지금 이게 뭡니까. 그동안 좋게 봤었는데, 조금 실망이네요.“     

실망이라는 말에 순간 정신이 들었다. 나는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반응했음을 깨달았다. 혹여 이 일로 엘리아나가 파트너십을 포기하겠다고 할까 걱정이 앞섰다.     


"아, 그런 뜻이 아니고, 선생님께서 물으셔서 솔직하게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나는 주눅이 들어 얼버무리며 변명했다. 엘리아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다행히 완전히 냉담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이에게서 상황을 조금이라도 정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말을 더하려 했지만, 조이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두 분 다 잠시 진정하세요. 파트너십에서는 이런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요. 서로가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만큼, 다툼은 불가피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다툼에서 어떻게 상대를 대하느냐가 중요해요. 특히 남자는 리드할 부분이 많으니, 여성분의 이해가 필요할 때가 많죠. 엘리아나 님께서 많이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선생님, 너무 데이빗 님 편만 드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게 다 제 잘못인가요?"

엘리아나가 조이를 바라보며 의문을 제기하자 조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엘리아나 님. 방금 다툼에서 데이빗 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저도 다 보았습니다. 데이빗 님이 온몸으로 짜증을 표현하더군요.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짜증을 내지 않은 건 아니에요. 감정을 숨긴다고 생각했겠지만, 몸과 표정이 모든 걸 말하고 있었어요.“     


"선생님, 짜증이라뇨! 저는 엘리아나 님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배려하려고 애썼다고요.“

억울한 마음에 조이에게 강하게 항변했다. 조이는 단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데이빗 님, 숨긴다고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상대방은 미세한 감정까지 다 느낍니다. 솔직히 털어놓고 조율하는 것이 건강한 파트너십입니다. 비겁하게 감정을 숨기지 마세요.“


"선생님 그건 아니죠, 저는 그녀에게 뭘 잘못했다고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그녀는 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제가 리드가 잘못하는 거라고 비난했어요. 그런데 제가 비겁하다고요?"     


조이의 말을 들으며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보고 느끼는 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았다. 꾹 참고 있던 내게 비겁하다느니, 솔직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말들에 동의할 수 없었다. 탱고를 배우는 입장이지만 인격이나 마음에 관한 건 내가 더 잘 아는 영역이었다. 잘 알지 못하면서 하는 말들이 날 더 화나게 했다.    

 

"데이빗, 미안해요. 선생님 말씀대로, 저도 당신의 짜증을 느끼고, 그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만 비교하는 말을 해버린 것 같아요."

조금 흥분한 탓에 의자에서 일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엘리아나가 내게 먼저 사과하며 말했다. 그녀의 사과를 듣고서야 내가 또다시 이성을 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에요. 느낌에 민감하죠. 특히 춤을 춘다는 건 그 영역에 더 예민해진다는 걸 의미합니다. 같이 춤을 추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떤지, 컨디션이 어떤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미묘하게 잘 느껴지게 돼요. 숨길 수 없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숨겼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오만한 생각이에요.”


조이는 내게 달래듯 다독이며 이야기했다. 그녀의 조언과 위로를 들으며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엘리아나를 따라 나도 사과했다. 조이는 파트너십을 하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너무 괘념치 말라 말했다. 그녀의 위로를 받으며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느 한 곳에서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감정에 휩싸이는 자신이 싫었다. 어느 정도 해결한 줄 알았는데,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파트너십을 맺고 춤을 춘다는 것은 서로의 감정에 민감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불편하다면 솔직히 말하고 조율해야 발전이 있을 겁니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보완해 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조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앞으로 서로에게 부족하게 느끼는 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불편한 것, 원하는 것들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춤이 늘 수 있다는 조이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조율이 되어가는 중에도 엘리아나가 먼저 사과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미안함에 정신을 못 차리는데, 문득 자윤이 떠올랐다. 그때도 먼저 사과를 했던가, 떠올려봤다.     


자윤과의 관계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사과를 먼저 한 적이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메디아 루나 - 오쵸 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