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악몽을 꿨다. 우습게도 꿈의 배경은 대학원이었다. 막 대학원을 다니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꿈은 펼쳐졌다. 꿈에는 그녀와 내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비어있는 방 안에서 밀회를 나눴다. 그 감각은 너무 생생했다. 손끝을 스쳐 지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의 감촉이, 피부에 스치는 그녀의 숨결이, 입술에 닿는 그 부드러운 느낌이 그때와 같았다. 꿈인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했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꿈일 뿐 현실이 아니었기에 너무나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던 방 문을 누군가가 열었고, 그건 대학원 지도 교무님이셨다. 그의 표정이 찰나로 굳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바닥을 쳤다. 껴안고 있던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서로를 밀쳤고, 그렇게 그녀와 나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꿋꿋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았었을까.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결말이 뻔했을지도 모르리라. 그럼에도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었다. 그녀가 죄를 인정하며 감찰원에 나를 넘기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꿈속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그렇게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가에서 물방울이 흐른 흔적이 느껴졌다. 베개가 젖어있었다. 괜스레 입가 주변을 닦았다. 생생한 꿈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실제로 방 안에서 밀회를 나눈 적 없지만 그러고 싶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그 꿈을 지금에서야 꿨다. 꿈은 잠시나마 행복한 감정을 선물했으나, 잠시나마 행복한 감정이 지나고 남은 건 오직 슬픔뿐이었다. 문득, 그때 어떻게 우리가 만남을 이어갔는지가 떠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학로 구석구석을 숨어 다니거나, 남들이 자주 가지 않는 카페에 갔었다. 그도 아니면 차를 빌려 외곽에서 우리만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 당시 나는 원죄를 지닌 죄인보다 못한 죄인처럼 살았었다. 결혼을 할 수 있지만 그녀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하면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며 특별하다 생각했다. 마치 부정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을 특별하다 여기듯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의 끝은 아름답지 않았고,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끝이 났었다. 그때의 생각을 하니 어딘가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애틋한 감정에 젖어 자윤을 떠올려봤다. 자윤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와 동시에 애틋함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분노가 미칠 듯이 차올랐다. 그녀가 나를 믿고 따라왔더라면, 적어도 내 탓이라고 모든 책임을 넘기지 않았더라면, 내가 지금 이렇게 눈물을 흘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너무 미웠다. 자신의 잘못이 큼에도 당당한 모습과 내게 잘못이 있다는 듯한 말투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게 자윤과 나 사이의 관계에 모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인식이 나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사과를 먼저 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일이 생기고, 우리가 싸우게 되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의 원리를 모르는 것 같다며 그걸 알려주려 했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문제로 힘들어할 때도, 다른 동기들과의 트러블로 인해 고민할 때도, 심지어 다른 동기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다며 화를 냈던 그때도, 그녀가 먼저 내게 사과했었다. 그녀의 잘못이라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이, 판단이, 감정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감정적이고 아직 마음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녀는 교무에 어울리지 않았다. 성직이란 길을 걷기에 너무 여렸고, 감정적이었다.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때마다 그녀를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내가 앎을 통해 그녀가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돕고 또 도왔다. 그러다 그녀의 인생이 꼭 이 방향성을 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했다. 그녀를 위한 말이었다. 성직을 그만두고 나와 결혼하는 게 어떻겠어, 고민 끝에 건넨 말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너를 위해 십 년을 기다릴 수 있다고, 그 징계의 기간을 버티고 참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진심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내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그녀를 설득하고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난 문제가 없고, 그녀가 문제였으니까.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고, 나는 어울렸으니까. 당장에는 거부감을 가질 수 있어도 설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우스운 착각이었다. 하필 그날 누군가가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됐고, 대화를 엿들으며 우리에 대한 이야기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소설은 순식간에 완성이 됐고, 소문은 되려 진실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당연한 듯 내 손을 놓았다. 그 후 나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야기의 결말, 욕망에 미친 사내가 사리를 분간하지 못하고, 함께 고결한 길을 걷는 순진한 성직자를 유혹한 사건, 이야기의 완성이었다. 각 부서의 부장들과 면담이 있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겠냐고 물었다. 잘못한 게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한다는 게 잘못이라면 그건 죽은 마음이라고, 진정한 마음공부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들은 내게 어리석다고 했다. 마음공부는 마음을 잘 쓰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만약 공부해서 감정 없는 목석이 된다면 그건 마음공부가 아니라고 소리쳤다. 괘씸죄가 추가되어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십 년의 시간은 부정당했고, 더 이상 성직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어제의 사건 이후로 자꾸 자윤이 떠올랐다. 심지어 자윤의 꿈을 꾸고 나니 과거의 일들이 먼지처럼 떠올랐다. 미련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무언가 정리되지 못한 파편이 가슴 한 편에 박혀있는 것 같이 남아있었다. 화를 내지 않았더라면, 조금만 더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먼저 사과를 했었더라면, 의미 없는 생각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헤집었다. 뭘 그렇게도 많이 안다고 잘난 체를 했을까. 아는 게 있긴 하는 걸까.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시작은 자신을 돌아보는 것부터 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모습을 보며 상대를 분석할 뿐 스스로를 보지 못했다. 나나 잘했어야 했는데, 새벽에게 자리를 뺏긴 이성대신 눌러왔던 감정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스승님께서는 지금 내게 뭐라 해주실까. 무시했던 스승님의 메시지를 열어보며 스승님을 떠올렸다. 답장이 없는데도 매달 첫째 날 보내주신 메시지들이 쌓여있었다. 읽지 않고 무시했던 메시지들을 열어 처음부터 읽어 내렸다. 안부 인사와 염려, 그리고 법문 말씀들이 열두 개나 됐다.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슨 염치로 연락을 드릴 수 있을까, 선 듯 메시지를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메시지함을 닫고 메신저를 열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관심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중에 인터뷰 이후에 왔던 메시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김수호 신부가 보낸 메시지였다. 장문의 메시지인 듯 몇 글자의 글씨가 보였고 그 후로는 말줄임표가 이어져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했다. 메시지를 눌러 그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는 내게 그때의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답이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