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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Aug 21. 2024

메디아 루나 - 오쵸 13

답장이 너무 늦었던 걸까. 스승님께서는 한동안 답이 없으셨다. 아마도 도리를 하지 못한 제자를 이제는 잊으신 모양이었다. 정말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했다. 사실 먼저 손을 놓은 건 내쪽일 테니 할 말은 없었다.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실낱같은 희망이 사라졌다. 이걸 희망이라 말하면서도 한 번도 스승님께 속을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 어쩌면 자업자득이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된 후로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잘하고 있다는,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들이 부질없이 느껴지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엘리아나와의 연습도 잠시 보류로 미뤄놓은 상태이기에 다시 시작한 수업시간도 초초하고 부담스러울 뿐 즐겁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욕망을 감추지도, 그렇다고 욕망을 표출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렇게 열정의 불이 꺼져갈 때쯤 조이의 호출이 있었다.


"처음 본 날 기억하세요?"

대뜸 사무실로 들어온 내게 조이가 말했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 아카데미에 처음으로 들어섰던 날, 가장 먼저 날 반긴 건 조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내게 조이는 내게 환영한다는 말 대신 왜 탱고를 배우고 싶은지 물었다. 나로서는 그런 조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배우러 온 사람은 나였고, 배우고 싶은 사람도 나였기에, 여러 말들을 고민하다가 멋있어 보여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조이는 다짜고짜 탱고는 섹슈얼적이거나, 이성을 꼬시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며 화를 냈다.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거니와,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나로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로써의 춤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찾고 싶었고, 마음속에 있는 진정한 나와 만나기 위하여 탱고가 필요했다. 오히려 세속적인 느낌이 나지 않는 춤이라 생각했기에 탱고를 고른 것이었다.

특히, '네 개의 다리, 하나의 심장'이란 문구가 강렬히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 하나 되는 느낌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런 조이의 반응은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조이에게 그런 생각은 전혀 없으며 '꼬라손'이라는 말에 감동하여 찾아왔다고 이야기했다. 조이는 잠시 위아래로 내 모습을 훑어보더니, 이성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이라며 누가 봐도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배우는 것 같다며 싸늘하게 말했다. 수강생을 더 받아도 모자랄 판에 내게 탱고는 그런 춤이 아니라며 화를 내는 조이가 신기했고, 어딘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하는 수 없이 조이에게 내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거의 모든 과정들을 이야기했고, 조이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사람에게 스스로도 창피하게 느끼는 과거를 이야기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조이 앞에서는 스승님을 뵌 것처럼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탱고를 배울 수 있는 허가를 받았고, 탱고를 배울 수 있었다. 조이도 같이 열심히 해보자는 말을 하면서 자신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 스스로에게도 놀랐다고 했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조이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녀를 마주 보고 앉았다. 조이는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뒤 조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조이의 표정은 무표정했으나, 어딘가 안쓰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모른 척하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렇게 강렬한 만남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죠, 제가 좀 많이 격양되어 있었죠. 그리고 데이빗 님은 굉장히 열의가 넘쳤고요. 그때 이후로 엘리아나 님하고 이야기 더 해보셨어요?"


 "아니요, 아직 못했습니다. 제가 엘리아나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파트너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서 잠정 보류하고 서로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대로 파트너십을 그만둘 건 아니죠?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크게 터치하지 않았는데, 이대로 그만두기엔 너무 아쉬운 거 같네요."

조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조이의 말에 모순을 느끼며 기분이 상했다.


"저번에는 탱고보다 다른 것에 관심 있는 것 같이 나무라시더니, 이제는 그만두지 말라고 하시네요."

조금은 삐뚜름하게 대답하며, 조이의 눈치를 살폈다. 조이는 표정의 변화 없이 내쪽을 보고 있었다.


"탱고 말고 다른 데 정신이 팔릴까 걱정을 한 거지 탱고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었단 거 아시잖아요. 탱고를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어서 제 나름의 노력을 한 겁니다. 데이빗 님도 구하고자 하는 바가 탱고에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탱고를 하면 제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갈피를 잡아가는 듯했으나, 제가 예전과 별반 차이 없이 형편없는 사람이란 사실 말고는 지금까지 알게 된 것이 없네요."

말을 하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신마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조이의 얼굴을 보기가 창피했다.


"파트너십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다툼의 원인이 뭔지 아세요?"

조이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게 뭐죠? 저처럼 자신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잘 안 되는 케이스를 이야기하고 싶으신가요?"


"비슷하네요. 대부분 파트너십에서의 다툼은 남 탓에서 시작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기보다 남에게서 찾고 싶어 하죠. 춤이 잘 되지 않는 것도 자신의 축, 무게중심, 스텝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설령 자신의 잘못을 알아도 자신의 잘못은 과하게 축소시킨 채 원인의 비중을 낮게 측정하죠.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해 냉혹하게 평가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파트너가 될 준비가 된 사람이죠. 마치 데이빗 님처럼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사람을 대하는 걸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더군요. 특히 가까워지는 관계일수록 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엘리아나 님에게 상처를 줄까 걱정이 되네요. 탱고를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고요."


"사람들이 남 탓을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뭔지 아세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요?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책임지기 싫어서예요. 잘못을 인정하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죠. 춤을 더 연습하거나, 더 주눅 들거나, 상대에게 기가 죽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책임지면 자신의 자존심이 깎인다고 생각해요. 또 그 책임들이 쌓여서 자신의 실력이 되면 파트너가 떠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 탓을 하는 거예요. 자, 그럼 데이빗 님은 어떠신가요? 책임지는 걸 싫어하시나요?"


"책임지는 걸 싫어하진 않아요. 당연히 책임질 건 책임져야죠. 도망치는 건 비겁한 겁니다."


"그럼, 결정 났네요. 책임지세요. 파트너십을 시작하셨으면. 지금 연락하세요.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지, 지금요? 갑자기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죠?"


"파트너에 대한 의리와 책임은 그런 겁니다. 같이 탱고를 연습하겠다는 건 도저히 하지 못할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함께 탱고를 해나가겠다는 뜻이니까요. 지금 연락하세요."

조이는 웃는 얼굴로 강경하게 말했다. 조이의 말에 백 프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뜻에 거스르기도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이가 보는 앞에서 엘리아나에게 곧장 메시지를 보냈다.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저번 일과 파트너십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메시지를 보내고 조이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조이는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하더니 잘했다고 이야기하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마음속에서 정리된 게 한 가지도 없었고, 아직도 방황을 하는 중이었으나, 뭔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일이 진행됐다. 다행히도 답장이 바로 왔고, 내일 저녁 엘리아나와 만나기로 했다. 이게 맞는 건가 고민했지만, 별다른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휘몰아친 덕분에 잠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조이가 말했다.


"과거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음악과 하나 되는 연습을 해보세요. 종종 저도 과거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춤을 추며 느끼는 경우가 있어요. 생각이 많은 상태에서 정답을 찾으려면 쉽지 않아요. 하지만 몰입된 상태에서 질문을 던져보면 오히려 그 해답이 더 빨리 나오죠. 탱고 열심히 하세요. 이성에 빠져있으면 그런 탱고의 묘미를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더 이야기하는 거예요. 데이빗 님은 찾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 조이 선생님은 과거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나요?"


"모두 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인생을 숨 막히게 했던 고민들은 하나둘씩 해결되고 있어요. 탱고를 통해 삶을 배우고 있죠. 밀러와 아르헨티나에서 만나 춤을 시작한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됐어요. 기억하시나요, 제 아버지가 성직자였었다는 걸? 인생 전반에 구원을 바랐지만 제가 답을 찾았던 곳은 이 탱고였어요.  데이빗 님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찾아갔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하며 조이는 가슴팍에서부터 시작된 성호를 그었다.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마주 인사했다. 그녀는 내 인사를 볼 수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끝으로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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