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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범 Nov 14. 2024

메디아 루나 - 사카다 10

sacada 10

사무실에 앉아 있음에도 그녀의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이쯤 되니 내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탱고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그동안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해 본 적이 있긴 하던가. 이제야,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원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저 무언가를 바라거나 바랐던 적이 없었다. 평생을 욕심은 나쁜 것이라 배웠다. 욕심을 가지는 건 좋은 게 아니라고, 욕심을 내면 인생이 힘들어진다고, 삶을 망친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의 대화 이후로 조이와, 엘레이나와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나를 좇아 다녔다. 원하는 걸 이야기하라 해도, 그걸 말하고 싶어도, 원하는 걸 말해 본 적이 없다 보니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 나조차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오랜만이네, 머리가 이토록 뜨겁게 들끓다니.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크게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마 눈을 감으니 조금이라도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눈을 떴다. 눈을 뜨니 화면에 띄어 놓은 자료들이 보였다. 네 명의 성직자들이 보낸 답변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받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대본 작업에 몰두했다.


첫 번째 질문인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에 대한 수호와 정율의 답변을 정리하며, 그들이 쉽게 보고 읽을 수 있도록 정렬했다. 그들이 자리에서 바로 보고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조정하며 대본을 만들어나갔다. 답변의 내용들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대중이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고르고 골라 답변을 작성한 듯 보였다. 그들의 답변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성직자로서 인생을 헛되이 살아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확실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연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조금 더 심사숙고하여, 성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들 뿐이었다.


그 내용들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에게 어떤 조언을 했을까. 이상적인 사랑과 현실적인 사랑을 나누는 순간부터 그걸 사랑이라 말하기 부끄러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란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면 조건을 따지지 않게 된다. 그 사람 곁에 있고 싶기에 조건을 달지 않게 된다. 서로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할 상대의 조건을 따지는 순간부터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일 것이다. 거래를 사랑이라 하진 않으니까. 그래서 아마도 그녀에게 물었을 것이다. 정말 그를 사랑하시나요, 라고. 그다음에 미소를 지으며,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고 같잖은 말을 늘어놓았을 것 같았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대답인가. 그 사랑의 결말이 어떻게 됐든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기에 그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알지 못했겠지, 그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책임져주지 않을 것이기에 그런 소리를 쉽게 뱉어대는 거겠지. 막상 현실에 막혀 당하고 보니, 그 말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 없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오기 전의 나였다면 그런 이야기를 했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기회만 된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를 이제는 알기에.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착각이었음을 알기에. 가만히 질문을 바라봤다. 자윤에게 그 선택은 현실적인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사랑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선택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한 사람이 사랑이라 말하는 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지. 사랑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깜빡이는 커서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화면 속 글자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정작 내가 답변하지도 않을 질문들을 놓고서 혼자서 망상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했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떴다. 빠르게 답변들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집중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노력과 달리 때때로 의미 없는 상상들이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만약에, 만약에, 라며 다른 미래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의식은 현실을 벗어나 꿈속을 유영했다. 그리고 그 꿈이 끝나면 현실이 크게 다가왔다.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적응할 만도 한데, 어리석게도 적응하지 못했고, 인정하지 못했다. 원망하지 않으려 했지만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었으니까. 조각나버린 이 마음을 어떻게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을까. 심지어 몇몇 조각들은 사라져 찾을 수도 없는데. 이제는 '나'라고 할만한 정체성이 없었다. '나'는 조금씩 의미를 잃어갔다. 


"그래도, 지금은 탱고를 하잖아"

갑자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러고는 작게나마 안심했다. 이게 뭐라고. 눈이 침침한 것 같아 눈을 비볐다. 초점을 맞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얼추 정리가 되었다. 잡념으로 시간을 너무 허비했는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빠르게 두 번째 답변을 마찬가지로 대본에 옮겨 적었다. 정리를 하며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신없이 집중하다 보니 조금은 차분해지는 듯했다. 생각 없이 연훈의 답변들을 규격에 맞춰 배열했다. 그의 대답들이 네가 틀린 게 아니라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다시 잡념에 휩싸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애써 외면하며 마지막 답변이 담긴 메일을 열었다. 


보내는 사람 옆에 적힌 자윤의 이름이 오늘따라 유독 눈에 띄었다. 클릭을 하려다 멈칫했다. 잠시 한 숨을 고르고 머리를 짚었다. 손을 놓고 의자에 기대었다. 차마 그 대답을 열어볼 수 없어, 노트북을 닫았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멍하니 천장을 봤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퇴근한 모양이었다. 쓸쓸한 마음에 주변들 둘러보다 다행히 사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발견했다. 지훈이라면 아마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리라.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로 향했다. 알 수 없는 적막감에 손에 땀이 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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