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묘미: 와인과 산화 -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beep~"
시아야! 너에게 혹시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니?
나에게 정말 소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사람.
그렇지만 마냥 편하지는 않은 그런 사람.
정해진 선을 훅 넘어오면 나에게 커다란 상처가 되는 사람.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미리 미리 '아이유'의 노랫말처럼 (이 선 넘으면 침범이야 beep 그 선 넘으면 정색이야 beep~~~) 경고를 날리고 거리를 두려는 노력이 필요할거야.
그런데 와인 (포도)에게도 이런 미묘한 애증의 대상이 있다는 것.
오늘 편지의 주제야.
와인 (혹은 와인이 되기 전 포도 까지도) 그리고 공기 (혹은 공기 중의 산소 분자 O2).
와인의 생애를 통틀어 - 포도가 와인으로 탄생하는 순간부터 오크 나무통에 담겨 천천히 익어가는 과정을 거쳐 병 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리고 누군가의 손에 열리기 전까지 이어지는 병 속에서의 긴 시간 -, 산소는 와인에게 꼭 필요한 존재야. 하지만 늘상 붙어 다니는 베프가 될 필요는 없어. 와인과 산소는 절제되고 제한된 만남이 필요한 사이야.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공기의 화학적 조성은 고도에 따라 변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지표면 부근에서는 부피분율을 기준으로 산소가 21% 정도 차지하고, 질소가 78%라고 해.
질소 분자 N2가 화학적으로 안정이 되어 다른 성분과 좀체 반응을 하지 않는 반면에 (비활성 기체), 산소 분자 O2는 반응성이 아주 높은 활성 기체라서 틈만 나면 다른 성분들과 반응하길 좋아해.
우리가 숨쉬고 사는 것만 봐도 산소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처럼 텐션도 높고 반갑게 막 들이대는 산소와 굳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와인이) 무방비 상태로 만남에 노출되면 영화 <헤어질 결심>의 '해준'처럼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산소에 노출된 와인을 '산화 oxidation' 되었다고 하는데, 산화된 와인은 생기를 잃어 오래되고 묵은 느낌이 들고, 과일이나 꽃 향, 그 밖에 기분 좋은 풍미들이 사라져버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제 더 이상 와인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신맛이 도드라져서 와인으로서 정체성은 '붕괴'되어 버리지.
여기까지만 들으면 산소가 마치 엄청난 빌런같은데, 오해하지는 말자.
산소는 그냥 자기 자리에 존재하고 반응성이 높은 것 뿐이야. 이런 산소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는 수준에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와인의 묘미야.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알 내부의 과즙을 얻기 위해서 '파쇄'하는 과정에서 포도 주스는 엄청난 산화의 위험에 노출되는데,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와인메이커는 무수아황산 SO2와 같은 항산화제를 법규가 정한 엄격한 범위안에서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해.
포도 주스는 효모라는 미생물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음식을 먹고 효모가 뱉어내는 물질이 바로 와인 (술로서의 에탄올, 알코올)이야. 효모에 의한 발효 과정, 즉 알코올 발효 과정인데 효모가 음식을 왕성하게 먹고 뱉어내기 위해서는 일단 효모 자체가 튼실해야 하고 효모의 집단 규모도 커져야 하는데, 이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산소야. 효모의 발효 활동이 왕성해지면 효모가 부산물로 이산화탄소 CO2를 뱉어내기에 자연스럽게 산소가 희박해지는 환경으로 변하게 되거든.
와인을 만드는 과정 곳곳에서 산소와의 절제되고 통제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어.
와인이 담긴 오크 배럴 (나무통). 나무 자체의 통기성으로 인하여 미세하게 유입되는 산소는 와인 숙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향과 맛 등 와인의 풍모가 복합적으로 발전하게 되. 갓 만들어진 어린 와인의 거칠고 떫은 맛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어.
대개, 오크통 숙성 과정에서 2~3차례 통갈이를 해주면서 오크통 아래에 가라 앉은 찌꺼기와 맑은 와인을 분리해주는데, 이 통갈이 과정에서 와인은 자연스레 산소와 만나게 되.
참고로 이 과정은 와인 용어로 '래킹 racking'이라고 부르는데, 래킹을 하는 주된 이유는 침전물 분리/제거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래킹 과정 중 산소와의 접촉을 통해 레드 와인 색깔의 안정화/색이 선명해지는 효과를 얻기도 해.
그리고 오크통 (또는 다른 재질의 저장 용기든)에 와인을 보관할 때는 빈 공간 (headspace)에 산소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통을 가득 채우거나, 산소가 아닌 다른 비활성 기체로 채우거나 혹은 다른 산화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해.
그럴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만일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와인이 산화된 와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아가 15년~20년 이상 병 숙성된 올드 빈티지 와인을 주문하는 일은 드물테니,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문한 와인이 산화되었다면 그 와인은 불량이고 당연히 다른 와인으로 바꿔줄 것을 요청해야 하고, 와인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레스토랑은 산화된 와인이 맞다면 다른 와인으로 기꺼이 교환해 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