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리히텐슈타인展: 눈물의 향기>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은 만화를 소재로 대형 캔버스에 작품을 제작하는 팝아트의 대표적인 거장 중 한 명이다. 동시대 팝아트의 황제라고 불리는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캔을 그리기 이전 순수 예술에 열망을 가지고 당시 유행하던 만화 회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내 그만두게 되었는데, 팝아트 분야에서 먼저 주목받았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아류가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워홀과 같은 시대에 살면서 그보다 앞서 나갔던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미술계의 주류였던 추상 표현주의에서 벗어나 만화와 광고 이미지를 대규모 작품으로 제작했다. 그는 대중적인 소재를 차용한 독자적인 시각 기법을 통해 문화적 클리셰를 전통 미학에 도전적인 맥락으로 편입시켰다. 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 전쟁·만능물질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랑을 주로 다루었으며, 원본을 연상시키는 두꺼운 검은 윤곽선, 과감한 색감, 의성어가 쓰인 말풍선을 사용하였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벤데이 점(Benday Dot)’은 만화 제작에 사용되는 중간색조의 인쇄식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
<로이 리히텐슈타인展: 눈물의 향기>는 스페인 아트콜렉터 Jose Luiz Ruperez의 콜렉션으로 총 8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대표작인 <Hopeless>, <Whaam!>을 비롯하여 작가 생활 전반에 걸쳐 작업했던 130여 점의 작품과 유명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벤데이 점을 활용한 만화 이미지의 작품뿐만 아니라 초기 포스터 작업, 잡지 표지 협업, 공예품 등을 다루고 있어 리히텐슈타인의 전반적인 작품 활동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미키마우스를 좋아했던 아들을 위해 만화책 그림을 그대로 캔버스에 그린 것을 시작으로 현대 미술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는 만화 이미지를 차용하면서 굵은 윤곽선과 단순한 색채로 표현되는 만화의 그래픽 스타일부터 인쇄 과정의 형식과 기법까지 따라 했다.
이때 리히텐슈타인은 연속된 장면으로 이어지는 만화의 한 컷만을 선택해 캔버스에 확대하여 그림으로써 극적인 화면을 보여주었다. 원본으로부터 독립된 이미지는 약간의 수정 작업을 거쳐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되었다. 이렇듯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내용상으로 극대화된 만화의 조형적 형식을 활용한 리히텐슈타인은 현대 소비사회의 기호화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리히텐슈타인은 현대 사회에서 대중매체의 반복과 복제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소비사회의 구조 속에서 대중들에게 하나의 표준화된 기호체계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만화의 일부 장면만을 선택하여 그리는 것은 이야기의 단절을 초래한다기보다 미디어의 개입으로 과장된 기호를 더욱 부각해 역설적으로 문화적 맥락 속에서 해석하게 만든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WHAAM!>을 통해서도 복제 이미지의 문화적 클리셰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두 대의 전투기가 격돌하는 찰나의 순간을 그린 작품으로 만화적인 표현과 문자를 결합하여 화면에 긴장감을 주고 역동성을 극대화하였다. 전쟁을 소재로 한 만화 회화에서 전쟁의 현실적인 감각을 지우고 사건의 특성을 과장하여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단순한 윤곽선과 강렬한 색은 원본보다 시선을 사로잡으며, 한순간을 정지시켜놓은 것과 같은 전투기 폭발 장면은 극적인 긴장감과 조작된 만화의 위트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만화의 기호체계에 숨겨진 함축과 순간적인 폭로를 담은 표현 기법을 통해 관람자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전쟁 상황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수 있게 된다. 전쟁의 현실과 유리된 장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앞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극대화되고 감정적으로 강조된 이미지는 대중들에게 주입되면서 하나의 진부한 표현이 되었으며, 리히텐슈타인은 이러한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연속성을 부여하는 일련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도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만화의 속성을 이용하여 집약적이면서도 단절된 감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동시에 현대의 소비사회, 대중매체의 이미지화를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워홀이 생산 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리히텐슈타인은 재생산된 이미지의 차용을 통한 대중들의 소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의 작품과 함께 원본의 만화를 위의 사진과 같이 보여주어 이해를 도왔다. 그럼에도 언뜻 보기에는 만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복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상을 감싸는 검은 윤곽선과 선명한 색상, 편집된 말풍선, 그 특유의 벤데이 점은 원본과 다른 느낌을 준다.
이미지 인쇄 과정에서 음영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벤데이 점은 상업 인쇄의 기본요소로서 작은 크기의 만화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확대하면서 인쇄상의 기술적인 과정을 의도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만화 이미지의 차용에 있어 미국 산업사회의 복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벤데이 점을 표현 기법의 하나로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에 리히텐슈타인은 벤데이 점을 두 개로 겹치거나 층을 움직이는 등 더 강렬하고 복잡한 효과를 주면서 패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무엇보다 벤데이 점을 기계적 복제에서 장식적인 기법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그는 패턴을 직접 그리는 행위를 통해 회화성을 드러내었다. 여기에서 점이라는 표현 기법을 살펴보았을 때,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과 같은 원리를 따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그들이 점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목적이 다르다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독특한 기법들인 벤데이 점과 굵은 윤곽선, 밝은 색채로 꾸민 공간은 작품과 잘 어우러졌다. 작가의 대표적인 특징을 활용한 공간은 하나의 작품처럼 자리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작품의 오브제와 인테리어 요소를 더하여 꾸민 포토존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팝아트의 거장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일생에 걸친 작품을 볼 수 있었던 전시였다. 그의 만화적 기법이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으며, 그만의 독창적인 화법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리히텐슈타인의 독특한 기법과 구성이 눈길을 사로잡았으며, 작품들을 가볍게 훑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