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야마의 길을 걷다가 차가 오는 방향을 미처 생각 못하고 하마터면 뒤에서 오는 차에 살짝 치일 뻔했다. 걸어 다니는 것도 이런데 오른쪽에 앉아 운전하는 건 얼마나 위험할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외로 반대방향으로 운전하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았다.
왼쪽은 작게, 오른쪽은 크게
우회전을 할 때 역주행을 하지 않도록 방향을 바꿀 때마다 주문처럼 ‘왼쪽은 작게, 오른쪽은 크게'를 외웠다. 문제없었다.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모르는 길, 밤길, 그리고 비…
이리오모테 섬에서 시작하다
편의점도 택시도 없는 오키나와 현의 이리오모테 섬에서 일본운전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섬의 가장자리를 따라 단 한 개의 주요 도로가 있는 오지라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다. 난이도 0. 하지만 차를 움직여 큰길에 나가자마자 깜빡이 대신 와이퍼를 켰다. 뒤에서 아이들이 “엄마!!!”를 외쳤다.
이리오모테 섬의 렌터카 업체는 두 개였다. 그중에 하나를 호텔에서 불러줬는데 한 시간에 4천 엔, 24시간엔 4500엔이라고 한다. 당연히 하루를 빌리기로 하고 기다리는데 잠시 후 귀여운 노부부가 나타났다. ‘McQueen’이라는 회사 이름으로는 전혀 연상되지 않는 모습으로. 할머니가 먼저 국제 운전면허와 여권을 확인하더니 할아버지가 ‘특별히' 제작된 영어 지도를 가지고 와 설명을 시작하셨다. 보험이라든지 추가서비스 같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대뜸 어디 갈 거냐고 물어보신다.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섬에서 갈만한 곳을 주차장 위치까지 집어서 설명을 해주셨다.
터널을 지나면 꼭 라이트를 끄라는 당부까지 들어있다
'퓨에루’가 뭔지 처음엔 못 알아들었다. 일본식 영어발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fuel을 ‘퓨에루'라고 할 줄은 몰랐다. 차를 반납하기 전에 반드시 항구 앞에 ‘브루'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란다. 그럼 '브루'라는 건? “색깔 ‘브루’ 말씀이신가요?” 하고 여쭤보니 그렇단다. Blue였다. 주유소 간판이 빨간색 하고 파란색이 있는데 꼭! 파란 간판으로 가라고. 그 이유를 나중에 기름을 넣으면서 보니 알 것 같았다. 주유소에서 얼마를 넣을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최대한 꽉꽉 눌러 ‘만땅' 도장까지 찍어 영수증을 받았다. 아마도 그 차를 알아본 것 같았다. 이 작고 오래된 차는 어디 부딪혀도 그다지 미안할 것 같지 않게 차체의 색깔도 문과 약간 달랐다. 후방 카메라는 당연히 없고 꽤 큰 엔진소리가 났다. 그래도 어차피 야생동물 보호차원에서 느리게 운전해야 하는 이리오모테 섬에서 충분히 즐겁게 타고 다녔다. 길에는 야생삵고양이인 희귀종 ‘야마네코(산고양이)’를 조심하라는 경고가 가는 곳마다 보였다. 이 섬에서만 산다는 이 고양이는 이제 백 마리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뒤에서 아이가 만약 치어 죽이면 어떻게 되냐고 묻길래 “그럼 99마리 남는 거지"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수동기어가 아닌 것만도 감사했던 차
그 이름도 정겨운 '만땅'
오키나와에서 운전하기
오키나와에서 차를 빌리는 게 은근히 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들었지만 공항에서 픽업한 렌터카 회사 셔틀버스가 호텔과는 반대로 가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공항에서 차로 8분 거리의 호텔은 점점 멀어져 가고 해는 졌다. (밤눈이 어두운 편) 게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온통 공사판인 길을 하염없이 가고 있었다. 퇴근시간대라 밀리기까지 했다. 일본 여행 3주 차에 최대위기였다. 도착한 도요다 렌터카의 커다란 매장엔 우리밖에 없는 손님을 위해 직원도 한 명뿐이었다. 복잡한 설명을 하길래 영어로 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내가? 영어로?”란다. 할 수 없이 오지에 며칠 있으면서 부쩍 좋아진 내 일본어를 시험하기로 했다.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들이 많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직접 겪어야 깨우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나라는 사실이 슬플 뿐. 왜 오키나와에서 한국인 렌터카 업체를 이용하는지 그때까지 몰랐던… 바보.
오키나와 섬처럼 크고 복잡한 곳에서 반납하는 장소를 코드로 적어주면… 어떻게 할까?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게이터에 입력하면 된다는데, 안 되면? 사고라도 나면? 문제가 생기면 전화하란다. “그게요. 이 핸드폰은 전화번호가 없답니다. 데이터만 되는 전화예요. 이메일 연락 안 될까요?" 그렇게 이메일 주소 하나를 보험처럼 받아 들었다. 일본의 하이패스, ETC 카드 사용법까지 듣고 이제 호텔의 주소를 내비게이터에 넣으려는데 호텔이름이 검색이 안 돼서 직원이 일본어로 옆 호텔 주소를 찾아 넣어주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차가 삐삐 소리를 낸다. 왜일까 생각하는 사이 갑자기 차가 오른쪽으로 제멋대로 움직였다. 놀라고 겁나기도 했지만 덕분에 왜 소리가 나는지 알았다. 왼쪽 운전석에 익숙한 내가 약간 왼쪽 선에 가까이 갔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한국인 업체였다면 카톡으로 연락이 가능하고 내비게이터도 아마 한글로, 무엇보다 복잡한 내용을 한국어로 설명 들었을 것이다. 오른쪽 운전석의 주의사항도 어쩌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사히 호텔에 도착하자 주차장에서 짐을 가지고 가느라 젖은 우리를 발견한 프런트 직원이 수건을 들고 뛰어나왔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엔 지쳐 우버로 KFC를 시켜 먹을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 운전에 비하면 이 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슈리성까지는 가뿐하게 보고 났는데 한 시간 반 거리의 수족관 가는 길이 문제였다. 안 그래도 길치인데 안드로이드 오토 연결이 안 돼서 고속도로에 못 들어가고 헤매다 결국 차의 내비게이터에서 한자로 된 추라우미수족관을 찾아냈다.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의 속도를 점차 올리다 결국 내비게이터에서 ‘날씨 문제로 제약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경고까지 뜨자 점심이고 뭐고 일단 수족관에 최대한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달렸다. 시골길은 포장은 잘 돼있었지만 오르내리는 길이 많아 고인 물을 헤치고 나가는 일이 잦았다. 거기서 길이라도 막아버려 내비가 가르쳐주지 않는 길로 돌아가야 하거나 고립이라도 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수족관의 진베이(고래상어)가 무척 반가웠다. 돌아오는 길엔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옆에서 아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가이드 삼아 이온몰까지 들렀다. 다음날 차를 반납하고 톨비를 정산하면서 그곳 직원에게 “부지니 가에리마시다(무사히 돌아왔습니다)”라고 하자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순간 고개를 돌리면서 뿜는 것을 봐버렸다.
홋카이도에서 운전하기
삿포로 시내에서 차를 빌렸다. 오키나와에서도 호텔을 처음부터 나하시내에 잡을 생각이었으면 아마 시내에서 차를 픽업했을 텐데, 원래는 아메리칸 빌리지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고 공항에서 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나중에 바꾸는 바람에 불필요하게 시간낭비를 해버렸다. 힘든 빗길 운전은 덤. 스스키노의 APA 호텔 1층에 있는 도요다 렌터카에 자신감을 갖고 들어갔는데 상냥한 이곳 직원은 몹시도 걱정이 되는지 이것저것 확인을 해댔다. 어디 가는지 계산해 보고 이틀짜리 ETC패스를 사는 게 이익이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다행히 안드로이드 오토도 금방 연결이 됐다. 노보리베츠로 가는 길에 아이누족 박물관을 들르려고 했는데 구글이 오늘은 휴관이라고 알려주었다. 반납을 공항으로 하느라 3300엔을 추가로 내야 했던 것 외에는 나름 행복한 렌터카 여행이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뒤늦게 생각해 보니 보통 렌터카를 하면 차종이 뭔지 확인하고 사진도 찍어보고 하는데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서는 잊고 넘어갔다. 어디 차더라? 렌터카 회사가 도요단데 도요다 회사차였겠지, 이런.
* 뒷이야기
이리오모테 섬을 떠나는 날,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렌터카 부부가 나타났다. 아마 내가 그날 아침 호텔 주차장에 반납한 그 차를 누군가가 항구에서 픽업하는 모양이었다. 차를 두 대 운전해서 하나를 손님에게 넘겨주고 한 차로 돌아가야 하니까 늘 두 분은 같이 다녀야 할 것이다. 부부가 함께 사업을 하는 일은 많지만, 이런 협업은 또 재미있다. 아는척 하려고 했는데 누가 손님인지 찾느라 대합실을 바쁘게 다니고 계셔서 마음으로만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운전 잘 하고 다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