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소의 독서일기 2탄
심리학 관련해서는 프로이트의 세계(원인론)에서만 살던 내게 아들러의 주장 (목적론)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내가 지난 몇 년간 고민해왔던 문제들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쉽게 정의를 내려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 하나의 문장은 다름 아닌 '용기의 부족'이다. 유엔에서의 계약이 끝나는 시점 (2016년)에 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피해 다녔었다.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이런 환상적인 커리어의 기회는 앞으로 더 이상 오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서.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로 예전만큼의 체력과 집중력을 가질 수 없다는 느낌이 들자 난 또다시 도망을 쳤었다. 어차피 한번 망가진 몸 상태는 더 이상 회복이 안되니 그냥 방치할 수밖에 없을 거야라고!
5장의 내용들은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를 통해서 (마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이) 아들러의 철학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1장과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5장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이 인상 깊다.
'1장 - 트라우마를 부정하라'. 나에게 있어서 트라우마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어릴 적 각인된 아버지의 모습이다. 항상 가족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살아오셨지만, 낮은 학력이라던가 사회적 위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위축되어 보였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일방적인 권위를 강요하는 그런 느낌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였다. 그래서 사춘기가 지나면서 그런 모습에 뭔가 강한 반감을 가졌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원하고, 다른 이들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당당한 그런 모습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돌이켜 보면 유엔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이유들 중 하나도 그와 관련이 있었다. 한국에 들어와서 방황하던 시절 부모님과 시간을 보낼 때 한 번은 아버지가 갑자기 화가 나셨고,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쌍욕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상당한 충격이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저런 정도 수준의 사람밖에 안되는구나. 그 당시에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결국 나도 저런 아버지의 자식이니 저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회의감이 심하게 온 적이 있다. 내가 유엔에서 일할 때는 잔소리 없으셨던 분이, 내가 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해주었던 이야기들이 내게는 조언보다는 모욕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왜 내가 가진 상실감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저런 식으로 밖에 이야기해주시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원인론적인 생각이 내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때의 지나간 시간들은 단지 운이 좋아서 내게 주어진 것일 뿐, 더 이상 그런 좋은 기회는 앞으로도 없을 거야. 어릴 적 엄청난 학대를 받았다거나, 정말 말도 못 할 충격적인 경험들을 한 일부의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게 언제나 풀지 못할 어려운 숙제였다. 이제 그런 숙제를 아들러는 과거의 원인에 얽매이지 말고, 내가 선택한 목적을 위해 용기를 가지고 변화를 추구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면서, "난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할 수 있는 걸까"라는 의문보다는 오히려 그의 철학에 공감이 잘 되었다. 곰곰이 지난 2년간을 생각해보면, 그 어느 누구도 내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냥 나 스스로 굴레를 만들고 거기에 점점 더 나 자신을 몰아세운 적 밖에 없었던 것 같다.
'5장 -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나비 커리어 프로젝트 1차 미팅 때 내 인생의 그래프를 그리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달리 내 인생은 10대 시절부터 30대 중반까지 계속 상승하는 이상한 (?) 인생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삶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눈 앞에 놓인 몇 안 되는 경우의 수들 중에서 선택과 집중을 잘하고 운이 따라줘서 별 탈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예전에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내 인생에 가장 큰 실패의 경험은 20대 때 도전한 1종 보통 운전면허 탈락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을 정도로 별다른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 그런 내게 있어서 30 중반대에 느낀 실패감은 내 스스로의 방향성마저 잃게 할 정도로 큰 충격을 줬다. 언제나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살아온 나는 아들러의 설명처럼 키네시스적 인생 (목적론적 운동)을 살아왔다. 이 산의 정상 (사관학교 입학)에 도달하면 다른 정상 (유엔 근무)을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 (또 다른 산의 정상)를 발견하지 못한 나는 마치 등산 중에 지도를 잃어버린 여행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런 내게 아들러는 에네르게이라적 삶 (과정의 상태)을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이 장을 설명하면서 인생을 마치 춤을 추는 것과 같이 살라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부터 살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좀 더 이해가 잘 된다. 춤의 실력을 떠나서 가끔은 한 곡동안 (3-4분 정도) 정말 파트너와 나만 생각하고 즐기면서 춤을 출 때가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과의 춤 실력 비교 (목적)보다는 나와 당장 내 앞에 있는 파트너 (현실)에 충실한 게 중요하지 않냐는 그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굳이 삶에서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애쓰기보다는, 그 과정 자체도 의미가 있으니 눈 앞에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어느 곳으로 도달할 것이라는 아들러의 생각은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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