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조롭고 기계적인 삶을 살던 한 사람이 시한부 판정을 받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된다는 설정은 이제는 식상하다고도 할 수 있는 플롯이다.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몇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여운이 깊게 남아 감상까지 쓰게 된 걸 보면 이 영화에는 분명 특별한 힘이 있다.
사실 주변의 방해 없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오티티 서비스를 애용하는 나를 극장으로 이끈 결정적인 촉매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썼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를 리메이크 했다는 것 역시 큰 몫을 했다. 빌 나이의 연기를 기대하고 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영화의 호흡은 느리고 스펙터클도 반전도 없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꼬대까지 했다.
이 영화를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듯 느린 호흡으로 보기를 추천한다. 빠르고 화려한 볼거리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이런 영화는 실제 윌리엄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삶을 돌아볼 기회를 준다. 천천히, 잔잔하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생각해보게 한다.
미스터 좀비, 시청에서 일하는 윌리엄스의 부하직원인 해리스가 붙여준 그의 별명이다. 그의 죽은 것 같지만 걸어다니고 움직이기도 하는 모습에서 기인한 이 별명은 윌리엄스가 그간 삶을 대해온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쩌면 깨닫지 못하지만 나 자신이기도 한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다. 뼈속까지 관료주의적인 그는 모든 일(사람들까지)을 요식적으로 대하고 처리해야 할 일을 일단 보류하기 위해 서류 더미에 끼워 넣으며 "해될 건 없으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해결해야 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일들은 직원들의 책상 위에 높게 쌓인 서류로 대변되고 해리스 양은 농담조로 첫 출근한 웨이클링에게 서류를 최대한 높이 쌓아놔야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언제나 높이 쌓아두라고 조언한다. 계속해서 높아지는 서류더미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류탑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그 서류와 관련된 사람들의 삶도 함께 멈추고 흘러가야할 삶은 그 자리에 고인다.
다행히도 윌리엄스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은 움직였다. 무엇이 수십년간 제자리에 멈춰 있던 그의 삶을 움직였을까. 흉물이 된 공터를 놀이터로 만들어 준 그의 박애주의적인 모습? 해리스와 보낸 솔직하고 꾸밈 없는 시간? 해맑은 아이들의 동심? 아니면 죽음을 목전에 둔 절박함? 이 모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행동(action)이라고 말하고 싶다. 묵혀두던 삶에서 행동하는 삶이 되자 그 자신도 살아 움직였다. 해될 건 없으니 일단 보류하던 그의 말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해될 건 없으니 일단 하게 됐다.
영화 초반에 유흥으로 삶을 즐겨보려 했던 윌리엄스가 술에 취해 Rowan Tree라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에는 계절마다 변하는 나무의 모습을 찬사하는 부분이 있다. 때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이다. 좀비가 된다. 아이들 없이 모든 것이 멈춘 놀이터는 죽은 것과 같다. 그네는 누군가 그 위에 앉아 흔들릴 때 살아서 제 몫을 한다.
모두의 골칫거리이자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문제였던 놀이터는 윌리엄스 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하수가 차오르고 쥐떼가 몰려들어 모두의 눈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곳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곳을 원하는 이들이 있다. 회생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버려진 땅 위, 발목까지 차오른 하수 속으로 과감하게 발을 내딛는 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변화의 여지가 있다.
윌리엄스와 우연히 카페에서 만나 그와 함께 흥청망청 하루를 보낸, 삶에 불만이 가득했던 서덜랜드와 본인의 목소리를 내진 못하지만 윌리엄스에게 알게 모르게 애정을 품고 있던 웨이클링, 자신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던 해리스도, 윌리엄스와의 짧은 만남 이후 움직이고 변화하는 삶을 살리라 생각한다.
사람들의 시야를 막고 있던 서류 더미의 높이는 점차 낮아질 것이다. 낮아지는 높이와 함께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흐를 것이다. 윌리엄스는 고여있던 주변 사람들을 흔들고 깨워 일으켰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밤, 윌리엄스가 앉은 그네가 흔들린다. 그는 행복하다.
그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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