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 by 나쓰메 소세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생을 살면서 남들에 비해 이룬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열등감과 허무함을 느낄 때가 많다. 여지껏 힘겹게 보내온 시간이 그저 낭비인 것 같고 나라는 사람이 주체적인 한 인간이 아닌, 사회를 위해 소모된 수동적인 인력일 뿐이라는 기분이 들 때 역시 있다. 하지만 여태 내 몸과 마음을 재료로 써가며 지내온 시간들이 결국 고유한 아름다움과 개성을 가진 나라는 사람을 빚었다.
한없이 추하고 못난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훌륭한 존재로 봐주는 생명체가 있다. 부모님도 아니고, 배우자도 아닌 강아지다. 우리의 변하지 않는 지긋지긋한 모습에 부모님도 지칠 때가 있고 질릴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강아지의 눈은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는다. 가끔 간식이나 공에 더 마음을 빼앗길 때도 있지만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도, 또 말썽을 피우다가도 우리를 올려다보는 그 눈을 들여다 볼 때면 나를 향한 그들의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온전히 느껴지며 온 몸 가득 따스함이 올라온다. 그 한없이 순수하고 투명한 눈동자는 눈에 호수가 담겨있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실현된 모습으로 나의 좋은 점만 골라서 보고 나쁜 점은 모두 걸러내기 때문에 그렇게 티 없이 맑아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가끔 궁금해진다. 강아지가 보는 세상은 어떤 것일지, 우리가 보는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이들의 눈을 빌려 보면 순수하고 선한 세상으로 보일는지, 이 티 없이 맑은 존재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대하고 바라보고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지, 왜 이들은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충성이 몸에 각인된 채 창조되었는지.
아직 강아지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책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통해 고양이가 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이 소설은 나쓰메 소세키의 책 중 가장 유명한 소설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도 잠깐 등장한다.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달라는 지인의 청에 주인공 요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건넨다. 인류의 존립 자체에 비판적이었던 요조가 추천할 정도니 그 재미는 보장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구닥다리 사고로 고지식한 외곬의 삶을 사는 영어 선생 구샤미 아저씨의 집에는 인간세계를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는 고양이가 있다. 이 고양이는 인간 못지않은 통찰력으로 인간 지식과 관습의 허무맹랑함을 꼬집어내고 이를 유머와 풍자로 멋들어지게 표현한다. 아무도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은 고양이 ‘나’는 인간의 자기도취, 허례허식, 허망한 욕심을 바라보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배워간다. 고양이의 눈으로 본 세계는 우스꽝스럽고 비합리적이며 안쓰럽기까지 하다.
고양이는 어리석은 인간을 걱정하다가도 실질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면 앞서간 철학자들의 지혜와 자신의 사색을 불러와 묘안을 짜내기도 한다. 가령, 본인이 아무리 현명한 고양이일지라도 고양이라는 신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한번은 쥐를 잡아야한다는 부담이 찾아왔을 때 머리를 굴려보기도 하고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기도 하지만 쥐에게 된통 당하기만 한 채 실패하자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결론을 내린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지혜가 나오지 않을 때는, 그런 일은 일어날 염려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가장 안심을 얻는 지름길이다.
이 두 살이 채 되지 않은 고양이는 사람보다 더 박학다식하다. 최초 여성 의사로 알려진 그리스의 산파 아그노디케가 산파업을 시작하게 된 일화나 학자와 작가 중 왜 대머리가 많은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대머리 때문에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기도 하고 야구공이 날아가는 모습에 뉴턴의 운동 법칙을 적용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익숙하지만 고양이에게는 낯선 물체인 거울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얼굴의 못난 점을 찾아내는 아저씨의 모습을 통해 ‘거울은 자만의 제조기인 동시에 자만의 소화기다’라는 명언을 남긴 고양이는 자신의 추함을 인정할 줄 아는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의 어리석음을 인지하는 것만큼 훌륭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며 칭찬을 해주기도 한다.
아저씨 댁을 찾는 기이한 괴짜 손님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세상사를 고찰하는 이 고양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본인의 표현을 빌려 ‘세상을 걱정하고 시대에 분노하는’ 고양이다. 근대화를 맞이한 일본인들의 고뇌를 나누고 모든 일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실업가들의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한다. 고양이의 예리한 관찰력은 사람의 어리석음만 꼬집어내는 게 아니라 사람 내면의 슬픔과 고민까지 꿰뚫는다.
태연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누군가에게는 더 큰 소리가 나고 누군가에게는 들릴 듯 말듯한 소리가 날 뿐이지 모든 인간은 각자 슬픔을 안고 살아간다. 고양이도 파악한 이 사실을 우리는 돌아서기만 하면 잊어버린다.
고양이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사람이 그저 어리석고 우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겸손해지듯, 강아지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모든 사람이 존귀해 보인다. 우리의 삶도 더 다채롭고 고상해지고 세상도 덜 위협적이고 덜 추악한 곳이 된다.
나 자신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을 때 강아지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나를, 또 세상을 바라보기로 한 번 더 다짐한다.
‘책을 읽도다,
춤추도다,
고양이의 화창한 봄날’
구샤미 아저씨에게 온 엽서에 실린 하이쿠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이다. 젊을 때에나, 중년이 되어서나, 훗날 백발이 된 노인이 되어도 책을 읽으며 좋은 음악에 춤을 출 수 있다면 말 그대로 화창한 봄날 같은 삶이다.
‘욕심을 내면 한이 없으니 평생 여기 선생 집에서 무명 고양이로 생을 마칠 생각’이라는 이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욕심내지 않기 위해, 작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기 위해 어렵지만 오늘도 한 번 더 다짐한다.
“산이 있어 이웃 마을로 가지 못하니 산을 부순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대신, 이웃 마을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을 해. 산을 넘지 않아도 만족스럽다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