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생이 May 18. 2024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주차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요즘 나에게 토요일 아침은 가장 힘든 요일이다. 지친 육체와의 싸움에서 매번 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휴일이 많은 탓인지, 일요일에 약속이 몰려서 인지 오늘은 홀린듯이 일어나 몇 달전 사두었던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김지수 작가가 죽음을 앞둔 이어령 선생과 매주 나눈 대화를 담은 <마지막 수업>이다. 


그가 도중 김지수 작가에게 건넨 말이 있다. "자네는 진리를 찾으러 왔지 않나." 시간이 흐를 수록 나의 생활반경은 좁아지는데 내 일상은 팽팽하게 날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속한 사회, 혹은 개인적인 내 삶조차 무언가 대단한 일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닌데.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사람은 이 줄다리기를 내려놓는 진리를 알지 않을까? 단순한 기대감이었다.


예전에는 책을 완독해야 독서라고 생각했다. 종이책을 선호하여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데, 돌이켜보면 금방 흩어지고야 말았다. 손가락으로 다시 곱씹고, 소화하면 가끔은 한두줄이 떠오르곤 한다. 책에는 총 16개의 주제가 있다. 이번 책은 4번에 걸쳐 읽고, 곱씹어보려 한다. 

 



목차

1. 다시, 라스트 인터뷰

2. 큰 질문을 경계하라

3.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4. 그래서 외로웠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거운 물은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알겠나? 




난 매번 KO패 당했어. 글을 쓴다는 것은 앞에 쓴 글에 대한 공허와 실패를 딛고 매번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나는 평생 도전이 필요한 인간이었네. 계속 쓰고 또 다시 썼네. 강해서가 약해서 다시 하는거라네.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네. 이길 수 없어. 다만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거 아니겠나. 방사선 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면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인가. 그 뒤에 더 산 건 '그냥' 산 거야. 





"언어가 틀에 갇히면 사고도 틀에 갇히겠군요" 


어쩔 수 없이 그렇다네. 틀에 갇히면 절대로 니체의 <토리노말>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없어. (중략) 나는 평생 누굴 보고 겁은 먹은 적이 없어. 헤겔, 칸트도 나는 무섭지 않았어. 나는 내 머리로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하나 내 머리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은 흔치 않거든.


상상해보게. 열 명이 있으면 열 명, 백 명이 있으면 백 명. 1억 명이 있으면 1억 명의 각각 다른 생각이 있는거야. 그게 정상이라네. 무엇이든 만장일치라면 그건 한 명과 다름없네. 국회의원이 백 명이든 2백 명이든 만장일치로 결의하면 국회의원은 한 사람이야. 




사람의 인체는 모든 게 정돈되어 있는데, 귀와 배꼽만 정돈이 안되어 있어. (중략) 배꼽을 만져보게. 몸의 중심에 있어. 그런데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배꼽은 내가 타인의 몸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물이지. 지금은 막혀 있지만 과거엔 뚫려 있었지 않나. 타인의 몸과 내가 하나였다는 것, 이 거대한 우주에서 같은 튜뷰를 타고 있었다는 것. 배꼽은 그 진실의 흔적이라네. 누워서 몸 위에 찻잔을 놓아보게. 어디에 놓을 텐가? 이마? 코? 아냐. 배꼽밖에는 없어. 비어 있는 중심이거든. 가장 중요한 것은 비어 있다네. 생명의 중심은 비어 있지. 다른 기관들은 바쁘게 일하지만 오직 배꼽만이 태연하게 비어 있어. 비어서 웃고 있지. 




오리지널리티가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이후 낭만주의가 생기면서부터였네. 그전까지만 해도 오리지널리티는 나쁜 뜻이었어. 보편적인 것을 위반했거든. 




인터뷰는 대담이 아니라 상담이야. 대립이 아닌 상생이지. 정확한 맥을 잡아 우물이 샘솟게 하는 거지. 그게 나 혼자 할 수 없는 inter의 신비라네. 자네가 나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왔으니, 이어령과 김지수의 틈새에서 자네의 눈으로 보며 독창적으로 쓰게나. 


'inter의 신비라는 말에 맥박이 빨라졌다. 인터뷰이와 나 사이에 상상의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이야기를 자네의 문맥 속으로 집어넣게. 그러면 헤어져도 함께 있는 것이라네.




나는 바울이 한 말을 제일 좋아했네. '나는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 (중략) 정오가 지나면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생긴다네. 상승과 하락의 숨 막히는 리미트지. 나는 알았던 거야. 생의 절정이 죽음이라는 걸. 그게 대낮이라는 걸. 


아이들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네. 가장 순결한 영혼이 어린아이야. 프로이트도 어린아이 놀이에서 그 유명한 '포르트-다(있다 없다 놀이)'를 발견했잖아. 두 살짜리 외손자가 실타래 가지로 노는 모습을 보면서 공포를 다루는 심리 연습을 캐치한 거지. 털실이 침대 밑으로 굴러들어가면 '어? 없네' 했다가 당기면서 '어? 있네'. 눈 가리면 엄마 없고, 손 내리면 엄마 있고. (중략) 엄마 없다? 엄마 있네! 어찌 보면 그게 우리 인생의 전부라네. 


"엄마 있네의 확신이 없으면 인생에 바람구멍이 뚫려버리죠. 가장 가까운 타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도 영영 떠난 게 아니라는 믿음. 그 믿음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지, 저는 압니다." 


엄마가 없는 쪽에다 힘을 싣느냐, 있는 쪽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져. 해피 엔딩으로 볼 수도 영원한 헤어짐으로도 볼 수도 있어. '있다 없다' 까꿍놀이가 결국 문학이고 종교야.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게 나의 마지막 희망이야. 그게 작가라네.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성경의 욥 이야기를 알고 있지?


"재산도 읽고 자식도 죽고 자신도 고통스러운 피부병에 걸려 폐허 속에서 돌로 몸을 긁었다는 욥이요?" 

견디다 못한 욥이 신을 향해 원망을 쏟아냈지. 그 때 한 말이 뭔 줄 아나? '이 고통을 반석 위에 쓸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억울한 것을 바위 위에 새길 수 있다면...그게 욥의 마지막 희망이었어. 성경에 나오는 욥 이야기네. 


"원망조차도 쓴다면 그게 희망이군요."




인간은 차마 맨정신으로는 자기의 몸뚱이와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거야.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휙 긋듯 한 번이야.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던데.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중략)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 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눈물은 아닐 테고요."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돌아보면 인간이 죽음과 함께 살았던 때가 생명의 시대였네. 길거리에서 거적에 덮인 시체를 보고, 방에서 할아버지가 죽고 장례 치르는 것을 어린 손자가 보았지. 


"제가 인터뷰한 장의사는 '죽음을 감출수록 산 사람이 잘 죽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고 하더군요. 숨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하거나 시신을 마주한 경험 없이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요. 가족이 떠날 때는 그의 시신을 직접 씻고 돌봐야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삶에서 내쫓았지요." 


죽음을 죽여버렸지.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렸지.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펜데믹 앞에서 깨달은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오늘 있던 사람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구나. 주머니에 유리그릇 넣고 다녀봐. 깨질 것 같아서 불안하지? 그게 죽음이라네. 진실의 반대말이 뭔 줄 아나?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고릴라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라네. 




딱 한 번 제비뽑기로 된 게 전화였어. 지붕 하나에 벽으로 두 집을 분리하는 '나가야' 연립주택에 살았는데, 그런 집이라도, 전화 한 대 놓으니 세상 다 가진 것 같았어. 옛날 사람들의 꿈이라는 건 참 소박했다네. 




"저는 살면서 요행수도 없었고 남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운이 나빴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어리석은 판단에 땅을 치고 후회할 때도 있었고,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불운에 비참해질 때도 있었지만,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합해 평균적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가진 능력 이상으로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운은 하늘의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던 그 변호사의 결론도 그거였어요. 얼마나 덕을 베풀고 사는가로 서로의 운이 다 연결이 되어 있으니, 크나큰 불운만 피해도 복 받은 인생이라고요.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안도했지요." 


운은 하늘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것이라고 했나? 그 생각이 궁극적으로는 운명론이라네. 그리스 사람들이 운명론자들이었어. 동시에 그들은 합리주의와 극치를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네. 지금 인간들이 발견한 물리학, 철학, 수학, 천문학, 미학 다 그리스 사람들이 해놓은 걸 기반으로 하고 있지. 그런데 지혜의 끝까지 가본 그 사람들이 운명을 믿었다는 거야.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야.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간 건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그리스에서 말하는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마라톤 경주를 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돌멩이가 날아와서 넘어진 사람은 '운이 나빴다'는 위로를 받을 만해. 그러나 인간이 노력할 수 있는 세게에 운을 끌어들이면 안 돼. 커트라인 1점 차로 누군가는 시험에 붙고 떨어지지만, 그것도 근접한 수준의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이야.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어. '노력해봐야 소용없다'는 자조를 경계해야 하네. 




모든 것이 나비 한 마리가 허리케인을 물고 온 격이지. 이게 곧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이야. 오늘의 자네와 나는 우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이건 운명이었네. 이 세상에 운명 아닌 것은 없으니까. (중략) 한밤의 까마귀가 안 보이더라도 어딘가에는 있어. 그렇지? 어둠이 너무 짙어서, 자네 눈에 안 보이는 것 뿐이야. 울기도 하겠지. 그런데 우리는 그 울음소리도 듣지 못해.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분명히 한밤의 까마귀는 존재한다네. 그게 운명이야. 


안타깝지만 실제 인생에서는 쉽게 관찰할 수 없어. 원인이 많으면 어떤 게 결정적 원인인지 모르거든. 우리의 인지능력은 한계가 있잖아. 인지 범위의 바깥의 것. 존재해도 감각적으로 파악을 못하는 거지. 그게 존재론이야. 있는 줄 알아도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반대로 내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느꼈던 것.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것도 내일이면 다 변하고 없어져. 




나 좋다는 사람 많지 않아. 모르는 사람은 좋다고들 하지. 이화여대 강의실에서 강의하면 5-6백명 좌석이 꽉꽉 차도, 카네이션은 다른 교수에게 주더구만. 


"섭섭하셨겠어요." 


섭섭했지. 강의실 인기는 대단했어. 내 강의에 영감을 받고, 내 글을 사랑해줬지만, 스승의 날 나에게 꽃을 들고 찾아오고 싶다는 친밀감은 못 주었던 모양이야. 그건 뭐랄까... 


"항상 지적 대치 상태 같은 긴장을 요구하셨으니까요. 온유하기 보다는 서늘했을 겁니다." 


그래서 외로웠네. 


그래서 외로웠네. 나는 속으로 스승의 말을 가만히 따라해보았다. 동굴 속에 숨어든 메아리 처럼 외로움이 덩어리째 만져지는 어조였다.


이 외로움 속에서도 수십 년씩 변함없이 관계를 맺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도 다 나 처럼 외로운 사람들 일거야.


평화롭기보다 지혜롭기를 선택해서 살았던 이어령의 치열한 나날들. 그가 그렇게 살았기에 우리는 여전히 스승의 옷자락을 붙들고 배울 수 있다. 여든여덟 살의 스승은 아낌없이 지혜를 나눠주는 동시에, 간간이 소년기의 고독과 지적 분투의 현장으로 빠져들었다. 




유독 곱씹게 된 것들 


1. 엄마가 없는 쪽에다 힘을 싣느냐, 있는 쪽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예전에 나와 함께했던 혹은 지금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기 보다, 이를 통해주고받은 inter의 시간이 중요하다. 때로 우리는 만났고, 이별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서로를 공유한 것이다.  


2.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돌아보면 인간이 죽음과 함께 살았던 때가 생명의 시대였네. "죽음은 나쁘고, 와서는 안되고, 불운이다"가 아니라, 나의 시간에 솔직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를 알 수 있는 기준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쓰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