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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우지렁이 Aug 22. 2024

작은 선의가 모여 마법이 일어난다

['지렁이 죽'을 준비하기] 구직급여 (3/4)

4월부터 수강 중인 숲해설가 수업은 참석만 할 수 있다면 너무 좋은 수업이다. 공부가 아니라 산으로 공원으로 놀러 다니는 기분이다. 선생님께 식물의 명칭과 특징, 쓰임부터 다양한 과학적 지식과 설화, 역사, 심지어 철학 등 재미있는 이야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저 많은 것들을 어떻게 외우신 거지..' 싶어지면서 나는 불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체력이 없는 내게 부산 전 지역으로 다니며 회당 3시간씩 걸리는 산행과 공원 탐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총 12주라는 수업 기간은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었고, 설상가상으로 학습관 근처에 있는 산 위주로 다니던 수업은 부산 전 지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수업과 마찬가지로 이 수업도 수료증을 받으려면 80% 이상의 출석률을 달성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횟수로 환산하면 2번은 수업에 빠져도 수료가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료증을 목표로 수업에 임했던 나는 이 사실을 적극 활용했다. 그렇게 '너무 멀어서', '비가 와서'라는 핑계로 수업에 2번 불참했다.


2번의 기회를 아낌없이 사용해버린 후 이제라도 모든 수업에 열심히 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회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한 번 더 불참하게 되었다. 이제 수료증을 받을 수는 없게 되었다.


수업을 듣는 가장 큰 목적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이런저런 핑계로 수업에 더 쉽게 불참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또 '비가 와서', '그냥 가기 싫어서' 등등등. 그렇게 수업을 아예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매 수업마다 학습매니저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늦어도 괜찮으니 올 수 있으면 언제든지 오라고.


처음에는 귀찮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된 챙김에 죄송해지기 시작했다. 컨디션이 나쁘더라도 일단 수업에 참여는 하기로 했다. 너무 컨디션이 좋지 않아 조퇴를 하는 한이 있어도 일단 얼굴은 비추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 야외수업인 6월 24일에 학습매니저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덕분에 좋은 수업을 조금이라도 더 들을 수 있었다고.


그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본 첫날부터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 신경 써줘야겠다고 생각하셨다고. 선생님께서 수업 가시는 복지시설의 지적 장애인분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처음에는 꽤 불쾌하고 당황스러웠다.


'역시 아픈 사람이라 티가 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바보처럼 보이는 건가?'


기분은 나빴지만 종종 '특이하다', '멍청하게 생겼다' 등등의 말들을 들었던 터라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도 된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으셨다. 내게서도 지적 장애인분들의 순수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이다. 좋은 의도로 하신 말씀이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지적 장애인분들과 비슷한 느낌이라니. 침울해졌다.


'난 역시 손이 많이 가는, 결국 1인분의 사람은 될 수 없구나.'





길고 길었던 숲해설가 양성과정 종강일인 7월 1일.


심적으로 많이 지치고 느슨해졌던 터라 숲해설가 마지막 수업에 참여하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이번 수업 장소는 평생학습관이라고 하신다. 평생학습관이면 갈만하지! 유종의 미를 위해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수업에 임했다. 그리고 수업 내도록 생각지도 못하게 엄청난 마음들을 받아버렸다.


우선 수업 시작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것저것 선물을 주셨다. 혼자 사는 내 끼니를 걱정한 학습매니저 선생님께서 떡볶이 소스와 초당 옥수수를 주셨고, 한 동기분은 본인도 좋은 일에 동참하게 해달라며 고양이 간식 캔을 주셨다. 어린이 대공원에 수업을 갔을 때 길냥이 공식 밥자리가 있길래 신기해서 항상 들고 다니던 고양이 간식을 부어줬었는데 그걸 보신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동기분은 직접 만드신 수제 비누를 나눠주셨다.


숲해설가 수업의 마지막답게 숲에서 주운 것들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많은 입술이 붙어있는 듯한 메타세쿼이아 열매로 팔찌도 만들고 다 같이 나뭇가지도 잇고 나뭇잎도 놓아 나무도 만들어보았다. 사용했던 나뭇가지로 다시 집도 만들어보고 나뭇잎으로 퍼즐 조각도 맞췄다.


마지막으로 수료식과 선물 증정식이 있었다. 수료증을 받으시는 분들께는 추가 선물이 있었는데 나는 수업을 반밖에 가지 않아 모두에게 주는 병따개만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양이 간식 캔을 주셨던 분께서 추가 선물로 고르신 모기기피제를 내게 주셨다. 반바지 좋아하는 것 같은데 모기 뜯기지 말라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매정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본인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 와중에 그러지 못하는 나만이 이용당하고 착취당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세상에 따뜻한 사람들도 생각보다는 많다는 사실을 이날 깨달았다.




7월 10일이면 만우절 결혼식이 100일째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향초를 만들지 않았다. 숲해설가 수업이 끝나 큰 일정도 다 끝났고 향초 만들기를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다. 재료는 거의 다 준비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면.


한참 전에 웹소설 작가님께 향초 재료인 소이 왁스와 오일을 받았다. 향초를 만드는 데에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찾아보니 향초 심지와 향초를 녹이고 굳힐 용기가 필요하단다. 향초를 녹일 용기로 쓰기 위해 햇반도 깨끗하게 먹고 씻어두고, 향초를 굳힐 용기로 쓰기 위해 적당한 테이크아웃 컵도 찾아 열심히 먹고 씻어뒀다.


아직 구비하지 못한 한 가지. '심지'. 향초 재료 3대장인 왁스와 오일과 심지 중에 심지가 없다. 심지가 정말 딱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하나만 팔지도 않아 남는 재료 처리가 곤란하다. 혹시나 인터넷보다 적은 양으로 좀 더 싸게 파는 사람이 있을까 중고마켓도 뒤져봤다. 판매자가 있긴 한데 왔다 갔다 차비까지 생각하니 배보다 배꼽이 크다.


장식용만이 아닌 진짜 사용까지 가능한 향초를 드리고 싶다. 그런데 향초를 태울 때에는 데코 한 꽃들 때문에 화재 위험이 있어 꽃들을 빼고 써야 한다고 한다. '장식용으로 쓰다가 정작 향초를 태울 때에는 그 예쁜 꽃들을 다 빼고 구멍 숭숭한 못생긴 향초를 쓰란 말이야?'


그건 내가 싫다. 최대한 오래도록 예쁜 향초를 드리고 싶다. 데코한 꽃들 때문에 화재 위험이 있다는 말을 뒤집어 '그렇다면 장식할 꽃들을 심지와 먼 겉면에만 두르면 최대한 오래 볼 수 있겠네?' 생각했고 '어차피 안쪽 부분은 꽃이 필요 없다.'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이소에서 파는 향초가 떠올랐다. 몰드로 사용할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다이소로 향했다.


'이건 안 들어가네… 이건 좀 너무 꽉 차. 적당히 여유 있는 사이즈 없나….'


심지 겸 꽃이 필요하지 않는 안쪽 부분을 담당해 줄 향초를 고르기 위해, 테이크아웃 컵에 여러 사이즈의 향초들을 넣었다 빼보며 적당한 사이즈의 향초를 골랐다. 이제 향초의 색과 향을 고를 차례. 이거저거 색상도 보고 냄새도 맡아보며 고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나를 반갑게 불렀다.


"우정 씨!"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움찔 돌아보니 숲해설가 매니저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도 마침 수업 재료를 사러 다이소에 오셨다가 나를 알아보시고 말을 붙이신 것이었다. 약간의 대화를 통해 부케 향초 재료를 사러 왔다는 말을 들은 선생님께서 마침 수업을 위한 꽃들을 사놓으셨다며 꽃을 나눠주셨다.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은 쉽다. 선생님께 받은 꽃들도 재빠르게 손질 후 옷걸이에 묶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이번에도 꽃들은 약 1주일 만에 예쁘게 말라주었다. 결혼식으로부터 99일째 되는 날, 향초 만들기에 돌입했다.


향초 만드는 법을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 서칭을 할 때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의 작품들도 보게 되었다. 업체에서 만든 향초들은 당연히 고급스럽고 우아했지만, 일반인들이 만든 향초는 상대적으로 어딘가 엉성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레퍼런스를 찾으며 웃을 일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만든 향초를 보고 있자니 다른 사람들의 향초를 보고 웃을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말린 꽃이라도 보였는데, 내가 만든 향초는 그냥 전부 침수다. 옆면도 그렇고 윗면도 그렇고 제대로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울퉁불퉁 난리도 아니다.


다시는 남의 결과물을 보고 함부로 웃지 않기로 다짐했다. 짧은 식견으로 내 결과물은 더 처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고, 겪어보니 어떤 일이라도 결과를 만드는 과정에 들어가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향초 재료를 주신 작가님과 꽃을 나눠주신 공방 선생님의 성의와 선물 받으실 새 신부님을 위해서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일. 끝날 때까지 끝난 것도 아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나는 인터넷을 뒤졌고 '헤어 드라이기로 녹여주면 울퉁불퉁한 표면도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고 꽃도 조금 더 드러난다'는 정보를 찾아냈다.


'살려보자.' 


드라이기로 향초를 녹이기 시작했다. 줄줄줄 줄줄. 향초가 땀을 뻘뻘 흘리며 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옆면도 당연히 매끄러워진다. 침수되어 있던 고대 신전을 발굴하는 작업 같다. 꽤 많은 양을 녹여내고 향초가 그럴듯해졌다. 역시 나만 포기하지 않으면 끝난 것이 아니다.


그렇게 100일째 되는 날에 새 신부에게 예쁜 액자와 향초를 전해드릴 수 있게 되었다. 향초를 전한 후 어느 저녁, 남은 재료로 좀 더 만든 향초에 불을 붙였다. 꽤나 영롱하다. 말린 미니장미로 윗면이 꾸며져 있고 옆면에는 유칼립투스가 감겨있다. 겉은 투명하고 속은 핑크빛이 비친다.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이지 사소한 선의로 시작했었다. 그런데 그 작은 선의에 또 다른 선의가 붙으며 스노우볼이 굴려지기 시작했다. 이것만 해도 크다고 생각했었는데 화룡점정으로 하나의 선의가 더 모였다. 그렇게 거대한 선의 스노우볼이 완성되었다. 작은 선의에 선의와 선의가 붙어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작은 선의에 붙은 마법은 비단 선물 받으실 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나를 위한 마법도 함께 일으켜줬다.


액자와 향초를 전달하고 며칠 후, 커뮤니티에서 '향기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향기 챌린지에 일정 횟수 이상 참여하면 꽃다발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침 최근에 만든 향초 만드는 방법도 공유할 참이기도 하고, 꽃을 좋아하시는 웹소설 모임장님에게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아 향기 챌린지에 참가하기로 결정. 그렇게 챌린지에 참여해 꽃다발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을 채웠다.


향초를 태우는 사진이 꽤 로맨틱했던 것인지 향초를 만드느라 고군분투한 것이 웃겼는지 부케 액자에 이어 부케 향초도 '지금 인기 있는 이야기'에 선정되어 메인에 걸렸다. 그렇게 부케 관련으로 쓴 글들 덕분에 커뮤니티 메인에 걸려보는 영광을 두 번이나 누려볼 수 있었다.


8월 중후순에는 챌린지 참여 경품으로 꽃다발이 왔다. 그런데 낯익은 꽃들이 보인다. 리시안셔스와 한 줄기에 두 가지 색의 꽃이 피는 신기한 꽃. 신기한 꽃은 최근 꽃을 사러 갔다가 한눈에 반해 이름을 외워두려 했는데, 화학 용어 같은 데다가 명칭도 길어서 외우지 못했던 꽃이다.


꽃다발 사진이 찍힌 카드도 같이 왔다. 카드를 뒤집어보니 QR코드가 찍혀있다. QR코드를 찍으면 꽃 이름을 알 수 있을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 QR코드를 찍으니 꽃다발 설명 페이지가 펼쳐졌다. 내가 반했던 신기한 꽃의 이름은 블루 옥시페탈륨. 그리고 꽃다발의 의미는 우울함을 치료하는 꽃다발, 이름은 해피어거스.


마침 자꾸 기분이 가라앉는 내게 도움이 되는 꽃다발이다. 예쁜 꽃을 보고 덕분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해피어거스를 모임장님께 전해드리고 마침 고민 중이던 여동생의 생일 선물도 꽃다발로 정했다.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 했던 동생도 막상 택배가 도착하자 엄청 만족하며 한동안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해 줬다.


부케 말리기가 나를 위해 걸어준 마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커뮤니티의 매거진과 인스타 홍보에 부케 향초 사진이 활용되며 마지막까지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다.


부케 말리기는 새 신부님께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시길 바라며 시작했고, 만드는 방법 공유는 좋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어 작성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향기 챌린지 참여는 모임장님을 위한 것이었고. 그런데 그 모든 행위들이 돌아돌아 나한테도 닿은 모양이다. 선의는 마법을 만들어낸다. 남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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